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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동의 지명유래 게시판 상세보기

[천안서북구문화원] - 지명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사직동의 지명유래
작성자 서북구문화원 등록일 2001-11-22 조회 1457
첨부  
 
사 직 동

사직이란 왕조의 주권을 이르는 말로 社는 토신(土神)을 뜻하고
稷은 곡신(穀神)을 뜻하는 것으로 군왕이 등극할때는 사직에 제
사를 지내고 나라의 흥성을 제사지내던 곳을 사직단이라고 하였
다. 1920년 지방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읍내리를 갈라서 남산정
이라고 하였다가 1946년 해방이 된 다음해에 왜식 동명을 없애
는 행정에 따라 이곳에 있었던 사직단의 이름을 따서 사직동이라
고 하였다.

남산(南山)
사직동의 남쪽 천안시장의 끝에 있다. 936년 고려태조 왕건이 8
만 7천 5백의 대군을 이끌고 후백제의 신검을 토벌하기 위하여
이곳 천안에 머무를 때 태조 곁에 있었던 술사 "예방"이라는 사
람이 천안의 지형지세를 살펴보고 간하기를 오룡쟁주(五龍爭珠)
의 지형이라고 하였다. 오룡쟁주란 다섯 마리의 용이 구술 하나
를 놓고 서로 얻으려고 싸우는 지세로 이곳 남산을 구슬(여의주)
로 보았다. 남산은 외떨어진 잔구로 어느 산에도 연결되지 않았
고 독립되어 있는 구룡이다. 조선시대는 사직단이 있어 사직에
제사 지내던 곳이고 일제때는 그들의 신사가 세워져서 많은 시민
을 강제로 참배시키던 곳이며 해방후에는 시민공원으로 조성하
여 오늘에 이르렀다.

남산비석가(碑石街)
해방이전 까지만 해도 남산아래 도로변에 많은 비석이 있었다.
관찰사 어사 군수의 선정비나 불망비등이다.(약 20여개) 그러나
도로확장과 주택건립으로 지금은 한 개도 없다. 비석이 많이 있
었던 거리라 비석거리라고 하였다.

용주정(龍珠亭)
남산 위에 있는 정자다. 1963년 지금의 중앙국민학교 앞에 있었
던 천안객사(客舍)가 낡아서 헐고 그 일부를 남산에 옮겨 세운
것이다. 본래 이곳에는 정자가 있었으나 (용주정의 뒤)없어지고
그 자리 옆에 세웠다.

수선정(水仙亭)
지금의 사직동 15번지에 있었던 정자. 옛 천안의 동헌(東軒) 앞
에 있었다. 인위적으로 큰 연못을 파고 목 가운데에 돌로 축대
를 쌓아 섬을 만들고 멀리 유량천에서 물을 끌어대어 못에 물을
고이게 하고, 고였던 물은 남쪽으로 빠지게 하였다. 못가에는 수
선화를 심어 꽃피게 하였다고 수선정이다. 수선정이 세워졌던 정
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1988년 중앙시장앞 도로에 전화선 매
설공사를 할 때 수선정의 정자 기둥이였던 것으로 보이는 8각 돌
기둥이 출토되어 구 천안문화원 마당에 보존되고 있다.(영성상회
의 주인 이선영시의 신고)이 돌기둥이 출토된 곳이 수선정이 있
었던 것으로 보인다.(지금의 중앙시장 네거리 외환은행 앞의 도
로)천안에 있었던 정자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정자로 알려지
고 있다.

※ 왜정 초기에 수선정을 헐어 남산의 남쪽 기슭에 옮겨 세웠으
나 그것도 없어지고 지금은 주추만 남아 있다. 이홍복의 기문이
남아있다.

※ 서릿말(西里)
천안시장(市場)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수도주물공장을 중심으
로 오늘날은 살기좋은 주택지로 가꾸어지고 있다. 천안을 대분하
여 東里와 西里로 구분할 때 불렀던 마을 이름이다. 東里는 지금
의 영성동과 원성동지역을 말하고 반대가 되는 지역을 西里라고
하였다. 일제때는 솥(釜)을 만드는 솥공장이 전쟁에 사용되는 무
기제조공장으로 둔갑을 하였고 일본인들이 한반도에서 본국으로
쌀을 가져가기 위하여 포장용 가마니를 만드는 공장도 이곳에 있
었다. 최근에는 시장이 형성되고 국도가 통과되며 경부선철도가
지나면서 급속히 발달된 마을이다.

사직단(社稷壇)
옛날 조선조때 토신과 곡신을 위하여 제향을 올리던 제단. 지금
의 남산위에 있었으며 토신과 곡신을 제사하였음은 국가의 번영
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 것으로 군수가 주제하였다. 사직단은
일제에 의하여 헐어 없어지고 그 자리에 일인들의 신사가 세어졌
다가 해방후에는 용주정이 세워졌다.

온양나드리
천안에서 온양으로 가는 길목을 말한다. 이 길을 통하여 서산,
당진으로 통하였고 태안반도 일대로 갈 수 있었다. 조선왕조의
왕실들도 이 길을 통하여 온양에 행차하였다. 지금은 경부선철도
에 가로막혀서 지하도가 설치된 뒤로는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
다.

잿백이(작은 잣백이)
온양나드리 지하도에서 사직동 시장으로 넘어가는 고개. 대흥동
과 사직동의 경계가 된다. 재는 峙로 고개를 뜻하는 것이고 배기
는 마루턱을 말한다. 천안의 동서 관통로로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으며 상점이 집중되어 있어서 상권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
다.

낙천관골(樂天館谷)
천안극장 앞 광제의원 옆에 일제때 낙천관이라는 요리집이 있었
다. 천안에서는 가장 큰 술집으로 경향각지에 이름이 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