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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성동의 지명유래 게시판 상세보기

[천안서북구문화원] - 지명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성성동의 지명유래
작성자 서북구문화원 등록일 2001-11-22 조회 1348
첨부  
 
성 성 동

본래 천안군의 북이면(北二面)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
합에 따라 사라리(沙羅里) 영성리(寧城里) 율동(栗洞:밤골)을 합
쳐서 聖人의 聖자와 寧城의 城자를 따서 성성리로 하여 영성면
에 편입되었는데 1953년 天安邑제 실시에 의하여 환성면에 속하
였다가 1963년 천안시에 편입되어 성성동이 되었다.

사라리(沙羅里)
성인동과 수릿터 사이에 발달된 마을. 성성동에서 가장 큰 마을
이다. 우리나라의 고대어가 우리나라에서는 사라져 없어지고 이
웃 일본에 건너가서 되살아난 말이 많이 있다고 한다. "사라"는
본래 우리나라의 古語로 접시라는 뜻으로 사용되던 것이 우리나
라에서는 없어지고 日本에 가서 되살아난 日本語로 접시가 사라
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사라리에는 점토로 그릇을 굽던
점말이 있다. (사라리 137번지) 지금은 전주이씨의 종터가 되었
다. 요즈음도 이곳에서 많은 그릇 조각을 찾아볼수 있고 옛 가마
터가 확실하다. 1970년 한글학회의 지명조사에 의하면 백제때에
그릇을 구울 수 있는 여건은 점토질이 좋고 바로 이웃에 차돌박
이가 있어 白土를 구하기가 쉬어야 하는데 이 부근이 손쉬었음
을 들 수 있다.

이언상의 묘(李彦祥의 墓)
이언상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6대손이다. 이언상도 삼도수군통
제사의 벼슬에 올랐고 바로 이웃의 아산에서 낳아서 이곳에 묻혔
다. 덕수이씨의 후손들에 의하여 묘가 관리되고 있으며 사라리
에 있다.

관청모롱이
영성리 북쪽 지금의 업성저수지 상류쪽이다. 고려때 이곳을 영주
(寧州)라 하였고 조선초에는 영산(寧山)으로 한 것을 보면 여기
가 관청의 청사가 있었던 곳으로 생각된다. 관청이란 옛 관아를
가리키는 말로 관아가 있었던 모퉁이라 관청모롱이라 하였다.

밤골(栗洞:방골)
밤골 또는 구밤골이라고 부른다. 밤나무가 많아서 밤골이라고 하
였으나 최근에는 방골로 불리고 있다.

노태산(魯泰山)
성인동마을 앞에 우뚝 솟은 산. 중국 산등성에 있는 태산의 이름
을 따서 노태산이라 하였다. 옛날 춘추시대의 노(魯)나라는 공자
의 태생지로 이름난 곳이라 魯泰山이라 하였고 산의 정상부에 공
자를 숭배하는 산제당(山祭堂)이 있었으나 지금은 자취가 없다.

성인동(聖人洞)
노태산 서북쪽의 산아래에 자리잡은 마을. 옛날 노태산의 정상부
에 산제당을 짓고 공자를 모시고 마을에는 성인과 같은 사람들
이 모여 살았다고 성인동이라고 하였다. 산록에 싸여서 마을이
밖에서는 보이지 않고 아늑하여 성인들이 사는 마을과 같다. (고
려 충신들이 순절한 개성 송악산의 杜門洞과 같은 느낌을 주는
마을이다.)

영성리(寧城里:靈城里)
천안을 옛날 고려 충선왕때 영주(寧州)라고 하였다가 조선 태종
때에 영산(寧山)으로 한 것으로 보아 이곳 어딘가에 군의 관아
가 있었음직하다. 천안시 영성동의 동명도 이곳에서 유래되었
다.

장나드리
업성저수지가 상류로 영성리에서 서북방의 들이다. 옛날 영성군
이 있을 물물을 교환하던 장터가 이어서 장나드리라고 하였다.
이곳은 아산만이 가깝고 소금과 바다의 산물이 들어오는 어구로
내륙지방의 곡식과 바꾸기에 알맞은 곳이라 시장이 세워졌다.

쉿대배기(솟대)
장나드리의 서북쪽에 있는 들. 옛날 사람들이 많이 왕래한 길가
가 天君이 다스리던 신성지역에 세워졌던 고대의 유풍이다. 솟대
의 기원은 정확하지는 않으나 청동기사회의 농업이 시작되면서부
터라고 보아야겠다. 마을 앞에 높은 장대를 세우고 장대 위에 나
무로 새(鳥)를 만들어 달고 새 옆에 볍씨주머니를 달아 놓거나
북을 매달아 신성지역임을 표시하였다. 뒷날에는Shamanism의 무
당집을 표시하는 것으로 변하기도 하였다. 업성동과 성성동의 경
계에 있다.

산제당샘(山祭堂샘)
영성마을 남쪽 노태산 밑의 우물. 옛날부터 노태산의 산제에는
술을 사용하지 않고 산제당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술을 대신하
여 이용했기에 매우 신성시 하던 우물이나 지금은 퇴화되어 사용
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상랑골
성인동마을 동쪽에 있는 골짜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산제를
지내는 재실이 이곳에 있었다고 하며 또 산재를 지내던 제관중
에 으뜸이 되는 자가(상랑) 여기서 살았다고 상랑골이라고 하였
다 한다.

바래밋들
구터방죽 아래에 있는 들. 구터방죽의 몽리구역을 말한다. 구터
방죽에서 바라보면 길고 넓게 펼쳐있어 바라다 보는 들이라 바래
밋들이라고 하였다.

길마전(馬房)
영성마을 관청모룽이 서쪽에 있는 들. 옛날 이곳에 길마전이 있
었다고 하여 길마전이다. 길마란 소의 등에 짐을 나르기 위하여
얹히는 안장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 말하는 길마전은 마방(馬
房)을 뜻한다. 말을 타고 가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마구(馬具)
을 고치고 팔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