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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정동의 지명유래 게시판 상세보기

[천안서북구문화원] - 지명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성정동의 지명유래
작성자 서북구문화원 등록일 2001-11-22 조회 1322
첨부  
 
성 정 동

하릿벌을 중심으로 발달된 동이다. 본래 천안군의 상리면의 지역
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번리(樊里)와 하리면
의 지정리(紙井里)와 풍천리(楓川里)를 합하여 성정리(城井里)
라 하여 천안읍에 편입되어 성정동이 되었다. 두정동쪽에서 흐르
는 작은냇물이 마을의 뒤쪽을 흐르고 안서동쪽에서 흐르는 천안
천이 마을의 앞쪽을 흘러 섬과 같은 곳이어서 옛날에는 (1940년
대까지도) 물난리를 자주 겪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천안시내에서
가장 발달된 도시이며 또 발전 가능성을 지닌 동이다.

하릿벌(下里伐)
성정동에서 가장 큰 마을. 1914년 실시했던 행정구역 통폐합때
천안을 上里 中里 下里로 구분했다. 이때 下理에 있는 벌판이라
는 뜻으로 下里벌 이라고 하였다. 6.25때는 피난민이 형성한 시
장이 일시 서서 하릿벌 시장으로 유명했고 마을 이름의 하리를
잘못 불러 화릿불로 부르는 일도 있다.

구산골(구상골 : 九山谷 : 九相谷)
하릿벌 북쪽에 있는 마을. 지금은 九山골로 불리우고 있으나 九
相골이 맞는다. 청동기시대 선사 인류들의 서식처이며 마을 남쪽
언덕에서 1963년 아홉기(九基)의 고인돌이 발견되었다. 옛부터
이 마을에서 아홉명의 재상(宰相)이 나올 땅이 라고 九相谷이라
고 하였다 전한다. 발견되었던 9基의 고인돌은 남북방절충식으
로 거대한 뚜껑돌(개석)을 동서방향으로 놓고 지석을 4개 세웠으
며 바닥은 잘고 둥근 냇돌을 깔아 시상(屍床)을 만들었다. 1963
년 학계에 보고되었으나 문화재로 지정받지 못하고 그후 시가지
조성계획에 따라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구상골 마을에서는 지석
묘인지는 모르고 돌위에 떡을 해놓고 가정과 마을의 안위를 기원
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석묘가 발견된 바로 이웃 마을의 개목에
서 선사시대의 유물이 많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곳에도 선사인
들이 많이 살았으리라고 생각되는 곳이다.

지정마을(紙井洞)
하릿벌 동북쪽에 있는 마을. 최근에는 도시의 발전으로 성정동
의 중심지가 되었다. 본래 지정마을에는 닥나무가 많이 있었고
닥나무는 한지를 만드는 원료로 그 껍질이나 가지가 이용되었
다. 한지를 만드는데는 물도 좋아야 한다. 좋은 물에 떠내야 종
이가 곱고 결이 좋다고 하여 지정마을의 우물이 가장 알맞아 많
이 이용되었다고 紙井마을이다. 또 지정마을은 支井이라고도 부
르며 支井은 斗井만 못한 것에서 支井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 支는 "게"에 통하는 말로 무엇만 못하다는 뜻이다. 예를 들
면 떡만 못한 것이 개떡에고 살구만 못한 것이 개살구다. 고로
斗井만 못한 것이 支井이다.

풍천원(楓川院)
지정마을 동쪽 지금의 공업단지 남쪽에 있었던 원(院). 원은 공
무로 지방에 가는 관리나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관리들이 또는
길가는 나그네들의 여독을 풀고 쉬어가던 곳이다. 풍천원의 자리
는 지금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이곳에서 쉬었던 길손들은 대
개 지금의 두정동 차암동을 경유하여 아산만으로 또는 평택지방
으로 가는 사람이 많았고 지금의 국도를 거쳐 직산의 수훨원으
로 통했다.

양지마을(陽地村)
최근 도시계획에 의하여 새로 이룩된 마을이다. 북쪽이 낮은 언
덕이여서 종일 햇볕이 잘들고 양지 밝아서 양지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