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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곡동의 지명유래 게시판 상세보기

[천안서북구문화원] - 지명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용곡동의 지명유래
작성자 서북구문화원 등록일 2001-11-22 조회 1217
첨부  
 
용 곡 동

일봉산 아래에 동서로 길게 펼쳐진 동이다. 동의 뒤쪽에는 높은
산이 가로막아 북풍을 막아주고 앞에는 큰 내가 굽어 흘러가며
주변에는 넓은 들이 펼쳐져서 전형적인 한국농촌의 모습을 갖춘
동이다. 천안시내에서 흐르는 天安川이 이곳으로 흘러 봉강(逢
江)에 합쳐지고 남쪽으로 멀리 광덕산을 바라보면서 터지고 산
과 내가 어우러진 좋은 고장이다. 1914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두
텃골 쌍룡리눈들 下里面의 다가리 일부를 병합하여 용곡이라 하
여 환성면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천안시에 편입되었다.龍沼의
龍자와 厚垈谷의 谷자를 따서 용곡동이라 하였다.

눈들(臥石洞:누은들)
일봉산 남쪽 산아래에 펼쳐진 마을이다. 일봉산의 서편 기슭에
둥글고 긴돌 2개가 가로 누어있어 돌이 누어있다고 하여 누은돌
이 변하여 눈들이 되었다.

※ 누은돌은(臥石)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에 나타난 선돌(立石)
(Menhir)이 있을 듯 하나 마을이 이루어진 뒤에 모두 없어진 듯
하다.

일봉산(日峰山)
눈들마을의 뒷산이며 천안의 명산이다. 최근에 체육시설을 갖추
어 시민체육공원이 되었고 일봉산악회원들에 의하여 정상에 8각
정이 만들어졌고 매일 아침이면 수백명의 야호부대원이 아침등산
을 즐기고 있다. 정상부분에는 언제 쌓여진 것인지 알 수 없지
만 토성이 있어 천안을 수비하는 구실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토성의 일부가 남아있고 8각정이 세워진 곳은 토성의 돈
대(敦 臺)로 망루(望樓)와 같은 구실을 하던 곳이다. 천안시내
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며 해를 맞는 산이라고 하여
일봉산이다.

용곡천(눈들내)
태조산을 수원으로 한 유량천과 노태산을 시원으로한 봉명천이
남산뒤에서 합류되어 용곡천에 이르러 큰 내가 된다. 우리나라
강천(江川)이 한 구비 돌때마다 한마을씩 남기는 것이 상례인데
한 구비 도는데 눈들부락을 형성하고 두번 돌아 두텃골을 만들
고 다시 돌아 정산터를 이루었다. 내 옆으로는 범람원을 이루어
넓은 들을 형성하였고 천안을 대표하는 곡창지대를 만들었다.(천
안을 대표하는 내다)

눈들방죽
1930년대에 용곡동 눈들부락의 남쪽에 사금채취선(砂金採取船)
이 들어와 사금을 채취할 때 파놓은 웅덩이에 물이 고여서 많은
방죽을 만들어 놓았다. 1940년 초까지 약 50여개의 웅덩이가 있
어 웅덩이의 군락을 이루었는데 해방후에 모두 메우고 농지로 활
용하면서 지금은 자취를 감추었다.

※ 한때는 천안 낚시꾼들의 낚시터로 각광을 받았다.

두텃골(厚垈谷)
일봉산 서남쪽에 남향받이의 아늑한 마을 두텃골을 한자로 표현
하면 厚垈谷 또는 厚基谷이다. 이 마을에 내려오는 설에 따르면
두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인심이 좋고 사람살기가 좋아서
두텃골이라 하였고 또 한가지는 마을의 생김새가 높고 낮은 턱
이 있어 두턱이 졌다고 두턱골이 변해서 두텃골이 되었다는 내력
이 있으나 세번째의 설이 가장 알맞은 설 같다. 셋째는 옛날 이
마을이 만들어질 때 鄭氏 두사람이 처음으로 집터를 마련하여 살
았다고 두터골(二垈谷)이 변음되어 두텃골이 되었다고 전한다.

용소골(龍沼谷)
눈들마을의 동남쪽에 있는 마을. 지금은 경부선 철도변의 마을이
다. 본래는 눈들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최근에는 마을이
커져서 눈들과 붙어 있다. 옛날 이곳에 작은 연못이 있었고 그
연못 속에 용(龍)이 살았다고 용소골이다.

장고개(場峙)
용곡동의 눈들마을에서 천안시내로 나오는 낮은고개. 지금은 경
부선 철도가 고개아래에 있고 고개의 끝쪽은 다가동과의 경계
다. 고개를 넘게 되면 바로 내를 건너게 되고 내 건너에 있는 시
장을 보러다니기 때문에 장고개로 불리워졌다.

미역공장
사직동의 남산에서 장고개로 들어서는 곳. 마을의 일부는 다가동
에 속하고 일부는 용곡동에 속한다. 1940년초에 이곳에서 생미역
을 말려서 시장에 내는 공장이 있었다고 미역공장이라고 부른다.

앞 들
눈들동리 앞에 펼쳐진 들. 들이 넓어서 남쪽의 끝은 풍세면에 연
속 되었고 서쪽은 신방동의 신흥리에 닿았다. 1930년대부터 1940
년초까지 사금을 채취하는 사금채취선(금배)이 수십개의 웅덩이
를 파 놓았으나 1945년 해방후에 모두 메워서 없어지고 지금은
들이 되었다.

참새골
일봉산 남쪽에 있는 골짜기 지금의 수도 저수탱크가 있는 곳. 옛
부터 참새들이 무리를 지어 살았다고 참새골이다.

새말고개
눈들동리에서 새말로 넘어가는 고개. 일봉산 서쪽에 있다. 옛날
에는 많은 사람들이 넘나드는 고개였으나 지금은 새 도로가 마
을 앞에 생기면서 한적한 고개가 되었다.

홍양호묘(洪良浩墓)
일봉산 남쪽 8각정 아래에 있다. 홍양호는 조선영조때의 석학으
로 1729년(경종 4)에 낳아서 1802년(순조 2)에 졸했다. 字는 漢
師고 號는 耳溪 謚號는 文獻公이다. 本貫은 豊山으로 벼슬이 이
조판서에 오르고 홍문관 대제학을 겸했다. 영조실록을 편찬하고
易象, 萬物原始北寒風土記등 여러편의 저서가 있으며 文集 49권
을 남겼다. 서예에도 뛰어나 水原北門의 상량문을 썼다. 원래가
박학이라 영조도 의문나는게 있으면 모든 것을 홍양호에게 물어
서 시행하였다고 한다.

정계인의 효자정문(鄭戒仁의 孝子旌門)
정계인은 용곡동 두텃골 출생으로 조선 숙종때 사람이다. 평소에
도 효행이 지극했다 하며 동리에서도 그의 선행에 칭찬이 자자했
다. 어느날 밤 도둑이 침입하여 재물을 빼앗고 반항하는 그의 부
친을 칼을 뽑아 죽이려 하였다. 이때 계인이 뛰어들어 몸으로 자
기 부친을 가리고 살려 달라고 손발이 닳도록 애원하였다. 그러
나 도둑들은 계인의 아버지를 무수히 난자하면서도 계인의 애원
에 감동하여 부자를 놓아 주었다. 그후 계인은 아버지의 병환에
자기의 손가락을 깨물어 숨이 끊어지는 아버지의 목숨을 연장시
켜 마을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이러한 사실을 동민들은 감사
에게 적어 올려 감사는 다른 사람들도 본받게 효자문을 세우라
고 명하여 오늘날까지 효자정문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