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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량동의 지명유래 게시판 상세보기

[천안서북구문화원] - 지명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유량동의 지명유래
작성자 서북구문화원 등록일 2001-11-22 조회 1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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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량 동

고려태조 왕건이 936년에 후백제의 신검(神劍) 양검(良劍)을 정
벌하기 위하여 천안에 군사를 주둔시키면서 8만여명분의 군량을
쌓아두었던 곳이라 하여 글자 그대로 유량동이다. 이곳에서 머물
렀던 왕건은 후백제의 군사가 북상하여 올 줄 알았으나 북상하
지 않고 경상도 선산(善山) 지방에 포진하므로 그곳에 내려가 격
전을 벌린 끝에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유량동은 본래 천안군의
상리(上里)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교촌리 당후
리 분곡리 상평리 하평리 평리 신리 상촌리 등을 합하여 영성면
에 편입되었는데 1931년 천안읍에 편입되었다.
※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국토의 재통일을 기하는 전진기지
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곳이 유량동이다.

향교말(校村里:교촌리)
전국의 향교가 있는 마을은 교촌리라고 부른다. 학교가 있는 마
을이라는 뜻이다. 왕자산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지금은 도시화
되었고 뒷산에 체육공원이 만들어지고 이웃에 오룡경기장이 설치
되면서 도시변의 마을이 되었다.

천안향교(鄕校)
유량동 190번지 왕자산 아래에 있다. 조선왕조 500년의 통치이념
이 유교였기 때문에 서울에 성균관이라는 대학기관을 두고 지방
에 향교를 세워 지방양민의 자제를 교육하던 학교로 유학을 공부
하던 곳이다. 향학의 시작은 고구려의 경당에 소급하여 볼 수 있
으나 그후 고려 인종때에 제도화되었고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
서 지방교육제도를 정비할 때 세워진 것으로 본다.(건립연대는
정확치 않다.) 대성전(大成殿) 명륜당(明倫堂) 동묘(東廟) 서묘
(西廟) 동제(東濟) 서제(西濟) 전사고(典祀庫) 삼문(三門) 등이
현존하고 있다. 開化 이후에 들어오면서 학교가 세워진 뒤에는
교육의 기능은 없어지고 다만 文廟로서의 역할만 하고 있다.

체육공원
최근에 천안시가 시민의 체육활동을 위하여 설치하였다. 명칭이
태조산체육공원으로 되었으나 잘못된 것이다. 공원이 설치된 산
은 왕자산이다. 고로 왕자산체육공원이라야 옳다.

왕자산(王字山)
유량동 마을의 뒷산이다. 멀리 천안삼거리쪽에서 산을 바라보면
산골짜기가 파여진 것이 王字모양으로 되었다고 왕자산이다.

태조산(太祖山)
민방위학교와 대한교육보험 연수원이 세워진 산. 멀리에서 바라
보면 둔삼각형 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천안의 진산(鎭山)이다.
936년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공략하려고 천안에 군사를 주둔할
때 태조곁에 있었던 술사(術師) 예방(倪方)이 태조와 함께 이 산
에 올라 천안의 지형지세를 살펴보고 오룡쟁주의 형상이라고 태
조에게 간했다는 산이다. 고려태조가 오른산이라고 하여 태조산
또는 태조봉이라고 한다.

형제봉(兄弟峰)
태조산의 줄기 민방위학교와 야영장의 북동쪽에 있는 산. 두개
의 봉우리가 나란히 서있는 형제와 같아서 형제봉이라고 하였다.

장태산(長泰山:장대산:將台산)
유량동 입구의 동남쪽 고속도로변에 있는 산. 고속도로에서 손
에 닿을 듯 하며 경관이 아름답다. 고려태조 왕건이 이곳에 주둔
할 때 장대(將台)를 설치하였다고 하여 장대산이 오랜세월 변하
여 장태산이 되었다.

마점산(馬占山)
장태산 뒤쪽의 높은 산. 천안의 구읍지 영성지에 마점산과 마점
사의 내력이 보인다. 고려태조 왕건이 이곳에 말을 매어두고 쉬
었다 하여 마점사라 하였고 마점사가 있는 산이라 마점산이라 하
였다. 왜정때 산정에 회전식 등대를 설치하여 항공기의 항로를
안내하였으므로 불빛이 회전한다고 불도는 산이라고 불렀다.

※ 마점산에 있었다는 馬占寺는 수차 답사하였으나 자취를 찾을
수 없다.

담넘어(堂越)
유량동 마을에서 남쪽으로 보이는 마을. 유량동 마을 앞에 흐르
는 냇가 언덕에 옛날에 작은 신당(神堂)이 있어 신당넘어 마을이
라 당넘어라고 하던 곳이 담넘어로 변음된 것이다. 지금은 신당
이 보이지 않는다.

대석골(臺石谷)
형제봉 밑 지금의 야영장이 있는 안쪽 골짜기. 맑은 옹달샘이 있
고 그 안쪽에는 약수터가 있다. 약수터 아래에 크고 넓은 바위
가 대석골이라고 하였다.

조라지고개(도라지고개)
유량동에서 천안군 목천면 덕전리 유왕골로 넘어가는 고개. 꼬불
꼬불 굽어진 고개길이 길고 험하여 넘어가는 도중에 졸음이 온다
고 하여 조라지 고개다. 지금은 도라지고개로 불리우고 있다. 신
작로가 개설되기 이전에는 목천지방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 천
안에 이르렀던 대로였으나 지금은 한적한 오솔길이 되었다.

동막골(東幕谷)
유량동 동쪽에 있는 골짜기. 지금은 몇 가호가 있으나 옛날에는
마을이 없고 농막(農幕)이 있었다고 하여 동막골이다.

벌말
향교말 앞의 긴 들속에 있는 마을이다. 벌판속에 있는 마을이라
벌말이라고 하였다.

분톳골(盆谷:둔텃골:분토골)
유량동 서쪽 왕자산 아래에 있는 마을. 마을의 생김새가 분(盆)
과 같이 오목하고 아늑하다고 하여 분곡이라고 하였다. 조선 인
조때의 학자 이승벽(李承壁)이 이곳에 살면서 마을 이름을 따서
호(號)를 분곡(盆谷)이라고 하였다. 또 다른설에 의하면 옛날 시
멘트가 없을 때 부엌이나 뜰을 칠하는 도료(塗料)가 분토(粉土)
였다. 이 분토가 많이 난다고 하여 분토골이라고 하였다고 전하
며 지금도 분토가 많이 나오고 있다.

북바위
옥녀봉 아래에 있는 바위. 바위의 생김새가 북(鼓)과 같이 생겼
다고 하여 북바위다.

불당골(佛堂谷)
유량동 안쪽 지금의 민방위학교가 있는 골짜기. 아홉사리고개를
오르는 첫 골짜기로 옛날에 이곳에 사찰이 있었다고 불당골이
다. 지금은 사찰은 없고 절터만이 남아있어 동국여지승람에 전하
는 留麗王寺나 馬點寺의 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석벽골(石壁谷)
유량동 동쪽 태조봉의 아래 골짜기. 대한교육보험의 아랫쪽에 있
는 골짜기를 말한다. 바위도 돌도 없는 골짜기이나 석벽골짜기라
고 불리운다. 동리에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옛날 이곳에 "석
벽"이라는 장사가 살아서 석벽골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쇠목고개(牛首峙)
유량동에서 안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민방위학교에서 호서대학
으로 넘어가는 고개) 아스팔트가 잘되어 산책하기에 매우 좋은
길이다. 태조봉을 소의 몸으로 보고 왕자산을 소의 머리로 보았
을 때 지금의 고갯길은 소의 목부분에 맞기 때문에 쇠목고개라
고 하였다.
(소목고개)

승천고개(升川고개)
유량동에서 목천면 승천골로 넘어가는 고개. 매우 높고 험하다.
天安川과 竝川의 분수령이다.(승천천의 물은 병천에 합해져 미호
천에 흐른다.)

아홉사리고개(九曲峙)
유량동에서 목천면 삼방리(三方里)로 넘어가는 고개. 크게 아홉
번 구비져 온다고 아홉사리고개다. 신작로가 개설되기 이전에는
매우 큰길로 목천지방 사람들이 천안에 오려면 이 고개를 넘나들
었다.(국수나 새끼를 사리듯 꼬부라진 고개)

양달말(陽洞)
분톳골 동쪽에 있는 마을. 아침 햇살을 받을 때부터 저녁해가 질
때까지 종일 햇볕을 받는 마을이라 양달마을이라고 하였다.

옥녀봉(玉女峰)
쇠목고개를 바라보아 오른쪽에 있는 뾰족한 산. 산의 모습이 아
름다운 옥녀모습으로 생겼다고 玉女峰이다. 마을에 전해오는 말
에 의하면 여자모양의 산이라 명당이 없는 산이고 만약에 이 산
에 무덤을 만들면 후손이 잘되지 못한다고 전한다.

용제봉(龍祭峰:선애골)
태조산 야영장이 있는 옆산. 용제를 지내는 산이라 용제봉이라
하였다. 용제는 기우제(祈雨祭)를 말하는 것으로 가뭄이 들고 메
말라서 농사에 지장이 있으면 이 산에서 제사를 지냈다.

하마비(下馬碑)
천안향교 앞에 세워진 비석. 어느 지방이나 향교 앞에는 모두 있
다. 비문은 大小人皆下馬라고 썼다. 지위가 높고 낮은 모든 사람
은 말에서 내려가라는 뜻이다. 향교에 모신 분들이 공자나 맹자
이고 모두 성현들이기 때문에 그 앞을 말을 타고 지나지 말라는
뜻으로 세워진 碑이다.

한티골
대한교육보험 연수원이 있는 아래쪽 골짜기. 골짜기 위에 아홉사
리 고개가 지난다. 한티란 큰 고개를 말함이니 큰 고개에 있는
골짜기라 한티골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