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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룡동의 지명유래1 게시판 상세보기

[천안서북구문화원] - 지명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삼룡동의 지명유래1
작성자 서북구문화원 등록일 2001-11-22 조회 1192
첨부  
 
삼 룡 동

옛 천안군의 군남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샛
골(鳥洞) 삼거리(三巨里) 무상리(舞裳里) 둔지리(屯地里)를 합하
여 삼거리와 龍馬山의 머릿자를 따서 삼룡동이라고 하였다.이곳
은 옛날부터 교통의 요지로 호남과 영남의 갈림길이고 따라서 길
文化(路邊文化)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오
가던 곳이다. 길가던 나그네의 많은 애환이 서려있고 민요따라
흥청거리는 능수버들로 뒤덮인 곳이다. 전라도 고부땅의 선비 박
현수와 기생 능소와의 연담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지금은 독립
기념관의 입구로서 또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구실을 다하고 있다.

삼거리(三巨里)
삼거리 방죽에서 서쪽으로 약 500m 대전으로 가는 국도변에 발달
된 마을. 이 마을의 중앙지점이 옛날부터 전해오는 천안삼거리
다. (原三巨里)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군이 군수물
자를 수송하려고 신작로(新作路)를 만들면서 옛길은 없어지고 지
금의 국도가 생기면서 오늘날의 장소로 중심부가 옮겨졌다. 지금
도 이 마을 복판에 옛 삼거리의 소로길이 흔적을 남기고 있다.

삼기원(三岐院)
삼거리에 있었던 원(院). 성환찰방(成歡察訪)에 속하였으며 공무
로 지방에 가던 관리가 묵고 가던 곳.(길손들이 쉬어 가기도 하
였음) 지금도 삼기원이 있었던 곳에서는 옛날의 영화를 말해주
듯 많은 와당편이 나오고 있다.

샛골(鳥洞)
천안시에서 삼거리공원쪽으로 가는 길 왼쪽에 발달한 부락. 부락
의 왼쪽에 천안삼거리 휴게소(고속도로변)가 있다. 윗샛골 아랫
샛골 두 개의 마을로 샛골로 불리고 있다. 마을의 유래는 새가
나르는 골이라 샛골이라고 하였다 하나 본래는 사이골(間谷)이
다. 산기슭과 기슭사이에 발달된 마을이라 사이골이 변해서 샛골
이다.

둔지동(屯地洞:조리터)
변전소 입구에서 삼거리공원을 향해 가다가 길위쪽에 발달한 마
을.(벨금속공장이 있다) 마을의 생김새가 복조리 같다하여 조리
터라고도 한다. 또 두둑하게 언덕진 곳이라하여 둔덕골이라고도
부른다.936년 고려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공략하려고 천안에 왔
을 때 군사가 주둔하였던 곳이라 둔지동이다.

무상동(舞裳洞:방죽말)
동리앞에 방죽이 있어 방죽말이다. 지금은 오작교와 팔각정 영남
루등이 있어 연못을 키웠으나 본래는 작은 방죽이다. 이 마을을
무상동이라고 한 까닭은 풍수지리설에서 온 동명이다. 마을 앞산
인 玉女峰의 玉女가 열두폭의 치마를 입고 가지런히 펴고 앉아
무릎위의 가야금을 뜯고 이따금 일어나서 춤을 추는 형상의 지형
으로 방죽마을이 玉女의 치마폭에 해당되는 곳이라 舞裳이라는
동명이 붙었다. 삼룡동에서 가장 큰 마을로 천안삼거리 개발과
발전이 기대되는 마을이다.

부처골(佛谷)
고속도로와 국도가 교차되는 곳에서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
이곳에 작은 암자가 있었고 부처가 있어 부처골이라고 하나 지금
은 보이지 않는다.

지경터(地境)
천안여자고등학교의 북쪽언덕 너머를 지경터라고 한다. 옛날 조
선말기에 木川縣과 天安郡의 경계가 되는 곳이라 地境터라고 하
였다. 옛날에 새로 부임하는 목천현감이 천안군 땅을 지나게 되
므로 현감을 모시는 말이나 교자가 이곳에 까지 와서 대기하였다
가 모시고 가는 경계지역이다. 신임 사또가 부임하면 여기서부
터 나팔이나 새납을 불고 앞장서면 신임현감의 부임을 알렸다하
여 나팔터라고 전한다.

선치미(線針이)
玉女峰 앞의 골짜기. 女子들이 치마에 주름잡는 일을 선침한다
고 한다. 옥녀봉의 옥녀가 입고 있는 치마의 주름에 해당하는 곳
이다. 선침밑이 변하여 선치미로 불리워지고 있다.

비석거리(碑石假:蛇頭穴)
무상부락(방죽말)앞 국도왼편에 坡平君氏의 묘가 몇 개 있고 묘
앞에 상석과 비석이 있어서 비석거리라고 하였다.이 묘소에는 재
미있는 풍수지리설이 전해오고 있다. 묘가 있는 낮은 구릉을 사
두혈(蛇頭穴)이라고 하여 뱀이 웅크리고 있는 모습과 같다고 전
한다. 길건너의 방죽에서 뛰어 놀고 있는 개구리를 잡을 욕심으
로 잔뜩 노리고 있는 지형인데 그 후손들이 묘소 앞에 석물(石
物)을 세워 뱀이 방죽에서 놀고 있는 개구리를 볼 수 없게 가리
게 되면서 후손들이 잘 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뱀의 먹이가 되
는 개구리를 볼 수 없게 되므로) 최근에는 모두 이장하고 비석
도 없어졌다.

영남루(永南樓)
천안삼거리공원 안에 있는 문루. 본래는 중앙초등학교 교정의 서
쪽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1603년(선조 35)에 세워진 화축관(華
祝館)의 문루로 있었던 것을 1959년 삼거리 공원의 연못 옆에 옮
겨세워 오늘에 이르렀다.

3층석탑(留麗王寺 )
삼거리공원 안에 있다. 원래 있었던 곳은 지금의 상명대학교 본
관 건물 아래 남쪽의 보리밭이였는데 지주 이관영이 발굴하여 당
시 환성면장 송제한이 삼거리 입구(대전과 목천의 갈림길)에 세
웠으나 그후 천안시가 공원 안에 옮겨 세웠다. 유려왕 사탑이라
고 전하나 정확하지 않으며 당초에 몇층인지도 알지 못한다. 3층
의 옥개석과 상륜부분은 없어졌으나 옥개석은 새로 만들어졌다.
고려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공략할 때 이 탑이 있었던 절에서 묵
었다고 留麗王寺라고 하였다.

탄금밑(彈琴밑)
현재의 신애고아원이 있는 곳이다. 玉女峰의 옥녀가 예쁜 치마
를 입고 무릎위에 가야금을 올려놓고 뜯고 있는 형상이다. 彈琴
밑이라고 하였던 곳이 탄금밀로 변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수
백년 전부터 탄금밑이라고 하였는데 최근 이 자리에 고아원이 서
고 風琴소리가 나게 되므로 彈琴의 풍수지리가 맞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