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메뉴 닫기
서브페이지 배경
안서동의 지명유래1 게시판 상세보기

[천안서북구문화원] - 지명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안서동의 지명유래1
작성자 서북구문화원 등록일 2001-11-22 조회 1334
첨부  
 
안 서 동

속명으로 엄리 또는 암리가 주된 부락으로 嚴里 岩里가 원음이
다. 지금도 신천부락의 윗쪽에 안서골(安棲谷)이 있어 이것에 연
유되어 안서동이라고 하였다. 성거 입장 안성으로 이르는 도로변
에 발달하였고 대개의 부락이 동쪽의 높은산을 등지고 서향하였
으며 山村지역이다. 산간의 계곡을 따라 부락이 발달되었고 上岩
(윗말) 中岩(중말) 下岩(아랫말) 新川(신천) 水越(무너미) 등으
로 나뉘어졌다. 본래 천안군의 북일면에 속하였던 지역으로 1914
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안서리로 되면서 1931년 천안군 환성면
에 예속되었다가 1963년 천안시가 승격되면서 안서동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최근에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태조산 각원사가 세워지
고 동양최대의 불상이 안치되면서 갑작스럽게 관광지로 각광을
받게 된 곳이다.

상암(上岩:상엄리, 윗말)엄리(岩里)중에서 가장 윗쪽에 있는 마
을이라 上岩 또는 윗말이라고 한다. 지금의 각원사가 있는 아랫
쪽에 펼쳐졌다. 계곡따라 양쪽으로 발달되었고 최근에 관광지로
변하여 많은 상가가 세워졌고 각원사와 좌불상을 찾는 관광객도
많다. 山地라 참나무가 많고 도토리묵이 명산이다.

중암(中岩)
湖西大學이 설치된 주변의 마을이다. 계곡의 중간에 있다하여 중
암 또는 중말이라고 한다. 오른쪽으로는 쇠목고개를 넘어 유량동
으로 통하고 왼쪽으로는 좌불상쪽으로의 갈림길이다. 왜정때부
터 금방아간이 설치되어 많은 사람들이 흥청거렸던 곳으로 지금
도 당시에 쌓았던 복사가 쌓여있다.

하암(下岩, 아랫말)
계곡의 가장 아랫쪽에 발달하였다고 하암 또는 아랫말이라고 한
다. 지금의 천호저수지의 동쪽이며 상명대학이 마을의 북쪽 언덕
에 있다. 대학이 설치된 후로 급격히 마을이 커졌고 교통도 발달
되었다.

유려왕사지(留麗王址)
상명대학이 있는 남쪽언덕 아랫쪽에 있었다. 지금은 자취조차 없
으나 1961년에 이곳에서 작은 석탑이 나와 확인되었으며 탑은 삼
거리 공원안에 안치되어 보존되고 있다. 고려태조 왕건이 후백제
를 정벌할 때 이곳에 와서 머물렀다하여 留麗王寺라고 하였다하
나 정확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다.

신촌(新村, 신천:新川)
무너미 골짜기 아랫쪽에 펼쳐진 마을. 천호저수지의 상류쪽에 계
곡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자리잡고 있다. 1920년대부터 상류쪽에
금광이 형성되어 채광된 광석을 이곳에서 모아 금방아를 찧었
다. 전학근씨가 처음 금방아를 설치하고 많은 금광석을 지어 지
금도 그때의 복사가 주변에 동산처럼 남아있다.

무너미(水越:물넘이, 천안무너미)
낮은 고개 하나를 두고 남쪽으로는 천안무너미, 고개넘어 북쪽에
는 직산무너미 마을이 있다. 무너미란 물이 넘어간다고 하여 본
래 물넘이다. 계곡의 상류에 무너미방죽이 만들어져서 물이 넘어
가리라고 생각치 못했던 고개에 최근에 물이 넘어간다. 참으로
조상들이 붙인 지명에 감탄할 수 있다.무너미고개는 옛 천안군
과 직산현을 나누는 경계이면서 分水領이기도 하다. 고개 북쪽으
로 흐르는 물은 망향동산을 옆으로 끼고 직산무너미를 지나 성거
읍 요방리 석교리 앞을 흐르는 한내(寒川)에 합해지고 입장천에
이르러 안성천의 거대한 내에 들게 되고 아산만에 닿는다. 한편
무너미 고개의 남쪽으로 흐른물은 천호저수지에 가두어졌다가 천
안천이 되어 아산의 곡교천에 합해져 아산만에 이른다.

※ 옛부터 天稷山이 높다더니 그 말을 실감나게 하는 고개이다.

※ 일설에 따르면 천안무너미 물이 고개를 넘어서 직산무너미로
넘어간다고 하였는데 이제 그 예언이 실현되었음을 볼 수 있다.

벌명당(蜂名堂)
옛부터 땅벌이 집을 짓고 사는 곳은 명당이라고 하였다. 안서골
뒷산의 무너미고개 위에 있다. 옛날 어느 사람이 이곳에 아버지
무덤을 쓰려고 묘혈(墓穴)을 파고 광중(壙中)을 지으려고 하였더
니 수천마리의 벌이 땅속에서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벌
이 날아간 자리에 시신을 묻고 장례를 치룬 뒤 그 후손들은 모
두 입신양명하였다고 전하며 그 전설에 따라 지금도 벌명당으로
불러지고 있다.

승적골(勝賊谷)
벌명당 북쪽에 있는 골짜기. 마을에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임
진왜란때 이곳에서 왜군을 격파하였다고 승적골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성불사(成佛寺)
태조산 서북쪽 산중턱에 있는 조계종계의 사찰, 신라말기에 풍수
지리설을 처음으로 열었던 도선(道詵) 선사가 창건하였고 고려목
종(穆宗) 5년에 담혜선사(湛惠禪師)가 중건하고 고려 원종(元
宗) 12년(1271)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 성불사 石佛에 대한 전설 옛날 하늘에 살고 계신 옥황상제께
서 두 마리의 仙鶴을 불러 인간세상에 내려가서 두 軀의 石佛을
만들고 올라오라는 명을 내렸다. 두 마리의 학은 부지런히 인간
세상에 내려와 부처를 쪼을만한 돌을 찾기 시작하여 그중의 하나
를 찾아 두 마리의 학이 힘을 합쳐서 太祖山의의 돌부터 부리로
쪼아 석불을 만들기 시작하여 부처를 완성하고 이웃 聖居山에 가
서 돌을 쪼으기 시작하였다. 그랬더니 해가 서산에 걸리고 날이
어둡기 시작하여 두 마리의 학은 석불을 완성하지 못하고 하늘
로 올라갔다. 그후 학은 다시 오지않고 미완성의 부처는 그 자
태 그대로 남았다. 仙鶴이 부처를 쪼아 만든 자리에 사찰을 세웠
는데 완성한 부처를 모신곳은 成佛寺라고 이름짓고 날이 저물어
미완성의 부처를 모신곳은 晩日寺라고 이름지었다.

갈뫼골(葛뫼, 葛山)
벌명당의 동쪽에 있는 골짜기. 마을에서는 걸매골로 불리우나 갈
뫼가 변하여 걸매가 되었다. "갈"은 칡을 말함이고 "매"는 뫼를
말함이니 칡이 많은 산이라 갈뫼라고 하였다.

안소골(安棲谷:안서골)
벌명당의 북쪽에 있는 골짜기. 안소골이라고 부르나 안서골이 원
음이다. 지금의 안서동이 유래가 여기에서 온 것이다. 무너미 골
짜기의 가장 깊숙한 곳이며 사람들이 편안히 쉬며 살 수 있는 곳
이라고 안서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