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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동의 지명유래2 게시판 상세보기

[천안서북구문화원] - 지명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오룡동의 지명유래2
작성자 서북구문화원 등록일 2001-11-22 조회 1190
첨부  
 
오 룡 동

송골(松谷)
호미걸이 고개를 넘어 첫마을이다. 옛날에는 고개 양쪽에 솔밭
이 우거지고 老松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산군 음봉면에
통하는 길가 마을로 몇 개의 주막이 있었고 점토로 옹기그릇을
구웠던 곳이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몇채의 집이 있을 뿐이다.

서밭댕이(薯밭)
백석동리의 앞들을 말한다. 옛날에는 가뭄에 물대기가 어려워 감
자를 많이 심었다고 하여 서밭이 되었다. 또는 조나 수수를 심었
다고 수수밭이라고 하여 서밭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옛날 이곳
에는 당집 : 神堂이 있었다.)

건는들(乾野)
백석동 앞들이다. 물이 귀한 건답들이라 건들이다. 환서초등학교
가 있는 교문앞에 작은 저수지(한들방죽)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는 매우 메말라서 모심기가 어려워 건들에서 온 말이다.

산적말(山寂洞)
호미걸이고개의 서남쪽에 있는 마을. 도로에서 마을이 보이지 않
고 한적하여 산적마을이다. 또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내륙지방 사람들이 소금을 구하기 위하여 아산만 쪽으로
가는 큰길가였기 때문에 산도적이 살던 산채가 있었다하여 山賊
마을이라고도 전한다.

승적골(勝賊谷)
개목뒷산(鳳樓山) 넘어 서쪽의 골짜기를 말한다. 길손을 괴롭히
는 山賊을 무찔렀다고 勝賊골이라고 하였다.마을에 내려오는 전
설에 의하면 임진왜란때 왜병들을 대파한 곳이라 勝賊골이라고
도 전한다.

서낭댕이(城隍堂)
백석동에서 성성동으로 넘어가는 낮은 고개에 있다. 고개를 넘나
들던 길손들이 고목나무 밑에 돌을 던져 돌묻이를 만들고 서낭신
으로부터 보호를 빌었던 곳이다. 지금은 아무 흔적도 없고 고목
만이 우뚝 섰다.일제때는 金을 캐기 위하여 서낭당 고개 밑에까
지 광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도둑골(盜賊谷)
호미걸이 고개에서 북쪽으로 군부대가 있는 골짜기. 도둑들이 모
여 살았다고 도둑골이다. 또 이곳에는 도깨비집이 있었다. 도깨
비를 위하여 마을 사람들이 거적으로 움막을 지어주고 도깨비를
살게 하였으며 초하루 보름으로 떡을 움막집에 해놓고 빌기도 하
였다.

※ 백석동은 아산만에서 생산되는 소금과 내륙지방에서 생산된
곡식이 교환되는 지점으로 옛부터 길손이 많았고 이에 따라서 행
인을 노리던 路賊이나 山賊도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루물(狐井)
농공단지와 백석동마을 사이에서 성정동 쪽으로 넘어가는 골짜
기. 「여우우물」이 변하여 여루물이 되었다. 여루물 북쪽에 작
은 우물이 있는데 가뭄에도 물이 끊이지 않고 넘쳐 흘러 여우들
이 먹고 갔다고 전한다.

서목골(서목골:西淵谷)
마을 뒷편의 현재의 농공단지에 있는 골짜기. 서목골이라고 전하
나 목골이 아니고 못골이다. 본래 이곳에는 작은 연못이 있어 서
쪽에 있는 연못이라 서못골이 서모골로 변음되었다.(지금도 작
은 저수지가 있다) 최근에 설치된 농공단지 때문에 점차 자취가
없어져 가고 있다.

큰골(大谷)
현재의 농공단지가 들어선 자리다. 골짜기가 커서 대곡으로 불리
웠고 글짜 그대로 큰골이라 큰 건물이 세워졌다.

작은 노태산(작은 魯泰山)
백석동과 두정동 사이에 정 3각형 모양으로 된 산. 두정동에 큰
노태산이 있고 백석동에 작은 노태산이 있다. 中國의 山東지방
에 있는 魯나라의 泰山이름을 따서 魯泰山이라 하였다. 山위에
작은 山神閣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고 군부대에서 세운 GP만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