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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리의 지명유래 게시판 상세보기

[천안서북구문화원] - 지명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대흥리의 지명유래
작성자 서북구문화원 등록일 2001-11-23 조회 1240
첨부  
 
대 흥 리

직산군 이북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홍경리, 대
하리, 대정리 일부가 병합되어 대정 대하리에서 대자를 홍경리에
서 홍자를 따서 대흥리라 하고 성환면에 편입되었는데 면이 읍으
로 승격되어 성환읍 대흥리가 되었다.

개방(開防)
갯방죽, 한 우물(큰우물) 남서쪽에 있는 마을. 전에 방죽이 있었
는데 사금(砂金) 캐느라고 없어졌다.

대정리(大井里)
한 우물(큰우물). 이 우물은 길가던 스님이 영기있는 우물이라
하여 해마다 음력 2월 2일이면 마을 사람들이 정성을 다하여 제
사를 지내던 우물로써 하나밖에 없는 우물이라 한 우물이라 한
다.

대동네
광해군때 민폐를 덜기 위하여 소사(素沙)들에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홍경사 앞에 세웠다. 이민구(李敏求)가 비
문을 지었다.

대하(大下)
대흥 저수지 아래에 있는 마을.

복병(伏兵)재
복병티. 뱃봉재라고도 하는데 홍경리 앞에 있는 낮은 재(고개).
정유재란때 명나라 장수 참정(參政) 양등산(梁登山) 부총(副總)
해성(解生)이 이곳에서 숨어 있다가 왜군을 크게 쳐부수었다고
한다.

한우물
대정리(大井里) 홍경리 동쪽에 있는 마을 우물이 있는데 청일전
쟁때 일본군이 이곳에 진을 치고 싸웠다고 한다.

홍경원(弘慶院)터
홍경사 앞에 있는 원(院)집터. 왕래하는 행인들의 편의를 위하
여 고려 제8대 현종때 함께 원을 두어서 출몰하는 도적의 피해
를 막았다.

홍경잇돌(弘慶院坪)
홍경원 앞에 있는 큰 돌. 조선 제7대 세조 10년(1464) 3월 17일
에 세조가 온양온천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서 하룻밤을 자고
갔으며 제14대 선조 30년 9월 8일에 명나라 장수 양등산과 해성
이 이곳에서 왜적을 크게 막아 왜적의 서울 진입을 막았다.

홍경사비(弘慶寺碑)
홍경사 터에 있는 비. 높이 214cm 넓이 10cm 고려 8대 현종 17년
에 한림학사 최충(崔沖)이 어명을 받아 글을 짓고 백현례(白玄
禮)가 글씨를 썼는데 홍경사의 사적을 자세히 적었으며 국보 제7
호로 지정되었다.
(전설)
비 갓위에 돌 세 개를 던져 올려 놓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아들없는 여인들이 돌을 던져서 비 갓위에 올려 놓으려고 돌을
많이 던져 비갓이 파손되었다.

홍경사터(봉선홍경사터)
큰 길가의 홍경사 터. 고려 제8대 현종이 그 아버지의 뜻을 받들
어 현종 7년(1016)에 이곳에다 큰 절을 짓기 시작하여 200여칸
의 절을 완성했으며 봉선홍경사라 하고 승려들을 많이 모아 불법
을 연구하게 하였으며 행인들을 도적으로부터 보호하였는데 공
주 명학소의 망이 망소이 난때 불타서 소실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