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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면(連山面)의 건치연혁(建置沿革) 게시판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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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산면(連山面)의 건치연혁(建置沿革)
작성자 논산문화원 등록일 2002-05-08 조회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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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면은 백제시대(百濟時代)에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이라 하
였으며, 신라 경덕왕(新羅 景德王)때에 황산군(黃山郡)이라 개칭
하고, 고려초(高麗初)에 연산군(連山郡)으로 바꾸었다.

현종(顯宗) 9년에 공주의 속현(屬縣)이 되었다가 후에 감무(監
務)를 두고, 조선 태종(太宗)13년에 현감(縣監)을 설치하였다.

1912년에 현 연산면, 벌곡면, 양촌면, 가야곡면의 일부와 식한
면, 두마면 일원, 부적면 일부, 진잠면 일부를 합하여 연산군(連
山郡)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연산면(連山面)
으로 개편되어 논산군(論山郡)에 편입되었다.

연산면은 본래 연산군의 소재지로서 현내(縣內, 郡內)면이라 하
여 황령(黃嶺), 신곡(莘谷), 남촌(南村), 북촌(北村), 신암(莘
岩)의 5개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개편 당시 백석면(白石面)
의 덕암(德岩), 당곡(堂谷), 상암(上岩), 상표(上表), 중표(中
表), 하표(下表), 신표(新表), 신범(新凡), 고양교(高陽橋), 행
정(杏亭), 도구(道龜), 덕산(德山), 용산(龍山), 망덕(望德), 덕
곡(德谷), 신소(新巢), 평촌(坪村), 사포(沙浦), 귀암(貴岩), 신
정(新井), 송산(松山), 구정(九井), 사현(沙峴), 삼송(三松), 산
소(山所), 어은(漁隱), 일암(日暗), 탄동(炭洞), 상오(上梧), 하
오(下梧), 부황(夫皇), 장전(長田), 장항(長巷)의 33개리와 식한
면(食汗面)의 교촌(校村), 하교촌(下校村), 관동(官洞), 하관동
(下官洞), 중개태(中開泰), 산노(山老), 한림정(翰林亭), 북계
(北溪), 상송(上松), 하송(下松), 호동(虎洞), 천호(天護), 화악
(花岳), 이동(梨洞)의 14개리와 외성면(外城面)의 소계(巢溪),
개정(盖井), 부황(夫皇), 청림(靑林), 중외(中外), 하외(下外),
왕덕(旺德), 구산(九山), 신림(新林), 남리(南里), 학정(鶴汀),
상림(上林), 중림(中林), 하림(下林)의14개리와 내적면(內赤面)
의 우수(牛首), 거정(居正), 고정(高井), 상범(上凡), 온산(溫
山), 하락(下落), 양촌(陽村), 청동(靑銅), 수정(水井), 한전(閑
田), 하범(下凡), 흔황(欣皇)의 12리와 노성군(魯城郡) 하도면
(下道面)의 숙진동(淑眞洞)을 병합하여 연산면이라 하고 논산군
에 편입되어 고정(高井), 고양(高陽), 관동(官洞), 덕암(德岩),
백석(白石), 사포(沙浦), 신암(莘岩), 송정(松亭), 송산(松山),
어은(漁隱), 오산(梧山), 연산(連山), 임리(林里), 장전(長田),
천호(天護), 청동(靑銅), 표정(表井), 한전(閑田), 화악(花岳)
의 19개리를 관할하여 오다가 1938년 양촌면 신양리(新良里)를
통합하여 20개리를 행정구역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리하여
연산면은 법정리 20개리에 35개의 행정리가 있고, 161개의 반이
있으며 111개의 자연부락으로 총면적은 53.28㎢이며, 인구는
2,969세대에 남자 5,050명, 여자 5,044명으로 총 10,094명의 주
민이 거주하고 있다.(1993.12.31 현재)

연산지역 황산벌은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백제의 장군 계백
(階伯)의 결사대 5천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신라장군 김유신(金庾
信)의 5만 군사와 최후 격전을 벌린 곳이고, 후삼국시대(後三國
時代)에는 고려(高麗) 태조 왕건(太祖 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한
곳이기도 하다.

이와같이 연산지역은 백제의 편에서 보면 망국한(亡國恨)으로
얼룩진 곳이요, 신라의 편에서 보면 지축을 월렸던 곳이기도 하
다. 200여년이 지난후 또 다시 후백제의 망국한의 혈루가 이곳
연산에 쏟아져 삼국재통일의 대단원의 막을 내린 그야말로 국운
(國運)이 걸려 있던 유서깊은 곳이기도 하다.

*참고-論山地域의 地名由來(1994년12월25일,논산문화원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