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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휘(金繼輝) 게시판 상세보기

[논산문화원] - 인물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김계휘(金繼輝)
작성자 논산문화원 등록일 2001-11-23 조회 1331
첨부  
 
본관/파 광산(光山)

시대 조선중기

【생몰년】 1526(중종 21)∼1582(선조 15)
【자·호】 중회(重晦), 황강(黃岡)
【성 격】 문신

1526(중종 21)∼1582(선조 15).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회
(重晦), 호는 황강(黃岡)으로 좌의정(左議政) 김국광(金國光)의
현손(玄孫)이며, 현감 김호(金鎬)의 아들로 사계(沙溪) 김장생
(金長生)의 부(父)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명종 4년(1549) 식년문과에 을과로 합격,
권지 승문원 정자(權知承文院正字)가 되고 바로 사가독서(賜暇讀
書)했으며, 이어 검열(檢閱) ·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 · 박사
(博士) 부수찬(副修撰) · 병조(兵曹) 및 이조(吏曹)의 좌랑(佐
郞)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치다가 친상(親喪)으로 물러났
다. 다시 명종 19년(1564) 승문원 교리로 기용되어 예조 정랑 ·
사간(司諫) · 집의(執義) ·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다가 1566년
의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 동부승지로 뛰어올
랐다. 선조 즉위후 사림계의 중진으로서 중망(衆望)을 받아 이
조 참의 · 예조 참의로 임명되었고, 선조 5년(1752) 박민헌(朴民
獻)과 함께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를 다녀와 황해도 · 경상도
· 전라도의 관찰사를 거쳐 공조 · 형조의 참판을 지냈다.
1575년 조정관료가 동인(東人) · 서인(西人)으로 갈라질 때 전배
(前輩)로서 서인(西人)에 속하였으며 대사헌으로 있던 선조 12년
(1579) 윤두수(尹斗壽) 등 소위 삼윤(三尹)의 뇌물사건으로 대간
(臺諫)의 탄핵이 심하자 이를 동인에 의한 서인 공격으로 인식,
도리어 대간(臺諫)을 비난하다가 당쟁을 격화시켰다고 하여 지우
(知友)이던 대사간 이이(李珥)의 힐책을 받기도 하였다.
1581년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한 주청사(奏請使)로 중국에 다
녀왔으며, 벼슬은 예조 참판에까지 이르렀다. 우리 나라의 인문
지리(人文地理)에 관한 기록을 남겼으나 왜란으로 소실되어 전하
지 않는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정조(正祖) 13년(1789) 나주
의 월정서원(月井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