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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독재 김집 게시판 상세보기

[논산문화원] - 인물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신독재 김집
작성자 논산문화원 등록일 2005-07-25 조회 815
첨부  
 
김집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로 자는 사강, 호는 신독재이며 본
관은 광산이다. 사계 김장생의 차자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8세
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과거를 포기하고 부친 김장생의
문하에서 오직 성리학과 예학의 공부에만 몰두하였다. 1610년 참
봉이 되었으나 실직에는 나아가지 않았고, 1613년의 계축화옥에
서숙인 김경손, 김평손 등이 연루됨에 따라 더욱 벼슬길을 포기
하고 아버지를 따라 선영이 있는 연산에서 내려와서 은둔하였
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면서 도덕정치가 강
조되고 산림을 중용하는 정치 기풍이 진작되었다. 이에 따라 김
장생을 필두로 하여 산림들이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고 김집 또
한 학행으로 천거되어 출사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그를 사헌부
의 헌관으로 부르고자 하였으나 사양하여 지방관이 제수되었다.
부여현감에 부임한지 4년만에 사임하였고 이후 임피 현령이 제수
되는 등 여러 관직이 주어졌으나 연로한 부친 간병을 위해 모두
사퇴하였으며 부친의 삼년상을 치른 후 에야 지평․집의 등
을 수
행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김집은 향리에서 의병을
모아 천안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인조가 이미 삼전도에 나아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군대를 해산하고 홀로
상경하여 진위하고 돌아왔다. 효종 초에 공조 참의를 거쳐 이조
판서에 올랐다. 그가 이판에 등용되는 것은 산림을 등용하여 북
벌을 실현하고자 한 효종의 북벌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는 것
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조정은 김자점 등을 축으로 하는 공서파
가 기득권을 행사하고 있어서 재야의 기풍을 가지고 중앙 정계
에 진출한 청서파 계열의 산당과는 정면으로 충돌 되었다. 당시
김집은 청음 김상헌과 함께 산당의 거두로 추앙되고 있었다. 그
러나 대동법 시행을 둘러싸고 김육과 불화가 일어나 관직을 버리
고 연산으로 돌아왔다. 특히 김자점이 효종의 북벌 계획을 청에
밀고한 사건이 있은 후 더욱 정계 진출의 뜻을 잃었다. 이후로
는 조용히 향리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특히 예서의 정리에 심혈
을 기울였다. 그 결과 부친 김장생과 함께 조선 예학의 성립을
가능케 한 대표적인 예학자로서 평가되고 있다. 사후에는 사림들
은 그의 정신을 계승하고 위업을 기리기 위해 곳곳에 서원과 사
당을 건립하였으며 문묘 및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경이며 저서로는 『신독재유고』『의례문해속』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