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메뉴 닫기
서브페이지 배경
선사시대의 청양 게시판 상세보기

[청양문화원] - 역사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선사시대의 청양
작성자 청양문화원 등록일 2003-05-14 조회 1062
첨부  
 
국경이나 영토의 개념이 없던 이 시기의 청양을 서술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데 현재의 청양지방을 지역경계로 삼아서 선사인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로 한다. 이곳에서는 구석기나 신석기유적
은 전무해서 논급할 수가 없다 따라서 청양의 역사는 마제석기
를 중심으로 하는 무문토기시대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현재 마제석기를 출토하는 유적은 청양면의 마제석검
(『有光敎一全集』2, 1990)과 장평면에서 구입한 마제석검이 (국
립부여박물관에 분2677로 수장되어 있으나 구입품이어서 정식자
료로 취급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나 정확한 출토지를 모르므로 제
외하고 목면의 지곡리(이은창, <호서지방의 선사유적조사>, (<고
고미술>4-8, 1963. 8)와 대평리유적(이은창 <청양의 대평리출토
석기>, <고고미술>3-5,1962, 5) 운곡면 후덕리(이은창, <앞의 글
> , <고고미술>4-8, 1963. 8), 영양리 유적(국립 부여박물관
장), 청남면 중산리유적(국립부여박물관장)등으로 나타나고 있
다.
따라서 청양의 역사는 마제석기를 중심으로 하는 무분토기시대부
터 시작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들 유적이 생활유적인지 분묘유적이지는 불분명하나 이
곳에서 출토된 마제석검은 이단병식으로 나누어진다.
예컨데 대평리의 석관묘 출토품을 제외하면 대평리의 석관묘 출
토품을 제외하면 모두 일단병식 마제석검이다. 석검의 형식학적
연구(김창호<유병식석검 형식분류 시론>, <역사교육론집>, 2,
1981)에 의하면 이단병식은 일반병식보다 빠른 시기에 속하고 있
으며 일단병식은 송국리 석관묘(김영배, 안승주, <부여 송국리
요녕식동검출토 석관묘>, <백제문화> 6.7, 1975. 12)나 여천 적
동 지석묘(전남대학교박물관, <여천 적량동 지석묘>, 1993)등에
서 보듯이 요령식 동검과 공반하는 예들이 증가하고 있는 반면
이단병식 마제석검은 요령식 동검과는 공반하는 예들이 증가하
고 있는 반면 이단병식 마제석검은 요령식동검과는 공반관계를
혀 확인할 수 없다. 한편 한강유역의 미사리 A-4호 주거지에서
는 무분토기시대의 빠른 시기에 속하는 공열토기와 빠른 시기에
속하는 고열토기와 공반하고 있는 점에서도 이반병식 석검이 일
단병식 석검보다는 빠른시기의 것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최소한
청양의 역사는 이단병식 마제석검을 중심한 무문토기시대의 초
기 단계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청양인들이 어떻게 삶을 영위했는지는 생활유적에 대
한 고고학적 조사례가 없어서 서술할 수 없지만 목면의 지곡리
와 대평리에서 호가인도는 지석묘와 대평리의 석관묘 그리고 운
곡면의 후덕리의 지석묘와 같이 지표에 나타나 있거나 일부 조사
된 자료를 토대로 하면 다른 지방의 사람들과 큰 차이가 없는 지
석묘와 석관묘에 묻히는 매장의례를 영위하면서 내화달천하류,
신양천중류, 목면의 지곡리를 감싸는 작은 하천하류 주변에 형성
된 낮은 구릉지대를 근거지로 살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예컨데 운곡면의 영양리나 청남면의 중산리유적은 구릉지대이어
서 수계를 중심한 구릉지대의 생활유저지로 판단해도 잘못은 아
닐 것이다. 다만 현재까지 보고된 지석묘의 수가 2-3기에 불과해
서 커다란 지역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엇을 가능성보다는 앞서 말
한 좁은 수계와 저구릉지대나 후배습지를 생활의 장으로 호라용
하면서 작은 자연마을을 형성한 일반적인 삶이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무문토기시대 초반부터 한국역사를 등장했던 청양은 한국
식동검기<이 시기의 유적은 일반적인 분묘의 조묘활동과는 달리
석관묘, 목관묘, 적석묘 등을 묘곽형식으로 채용하면서 지하 깊
숙히 매장을 하는 개인묘 중심 즉 단독무덤으로 존재하고 있ㅇ
서 (최종규 <무덤에서 본 삼한사회의 구조 및 특징>, <한국고대
사론총>2, 1991)우연한 기회가 아니면 발견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한국석동검유적 가운데 정식조사를 거친
예는 한 곳도 없음에서도 보증된다.>와 원삼국기(기원전 5.6세
기 -기우너후 3.4세기)의 무려 1000년에 가까운 시기를 역사의
공백지대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무문토기시대의 후반에 속하는 한국식동검과 관련괴는
유적이나 자료는 전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의 단절현상은
앞으로 정밀지표조사를 거치면 메꾸어질 것으로 생각된다. 다행
하게도 기원후 1-3세기는 중국쪽의 기록과 지리지가 남아 있어
서 약간은 도움이 된다.

<청양군지>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