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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 ▶이자송(李子松)▷청양읍 교월리 게시판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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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충신 ▶이자송(李子松)▷청양읍 교월리
작성자 청양문화원 등록일 2002-05-20 조회 1165
첨부  
 
고려말의 충신 이자송(李子松)의 묘가 청양읍 교월리에 있다.
이자송은 본래 청양사람으로서 공민왕때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지내고 공민왕(恭愍王) 13년(1364)에 덕흥군(德興君)의 변이
있어 원나라 황제가 모든 고려 사람으로 하여금 덕흥군을 받들고
귀국토록 강요하였으나 홍순(洪淳)과 함께 연경에 숨어서 따르
지 않았다. 그 뒤에 귀국하여 그 절의를 높이 창찬받아 밀직부
사(密直副使)가 되고 단성보조(端誠輔祚) 공신의 호를 받았다.
그후에 다시 동북면 존무사(存撫使)로 안변(安邊) 등지에 침입
한왜구를 물리쳤으며 우왕때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순위부상만
호(巡衛副上萬戶)를 겸직하며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우
왕(瑀王)이 국사를 소홀히 하고 주색에 방탕함으로 이를 간하였
으나 도리어 미움을 받아 벼슬을 그만두고 공산(公山) 부원군
(府院君)에 피봉되기도 했다.
우왕14년(1388) 최영(崔營)이 신우(辛禑)게게 요동(遼東)을
공략함을 적극 추진하자 이자송은 작은 나라가 큰나라를 치는 것
은 오히려 위험하다고 반대하자 최영이 이자송을 해치려 하자 이
성계는 말하기를 자송은 비록 죽으나 그의 미명(美名)은 후세에
빛날 것이다 하고 그를 도왔으나 전라도에 귀양하게 되고 귀양가
다가 피살되었다. 본래 청렴한 사람으로 모든 사람들이 재상되
기를 원하였었는데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슬퍼하지 않는 사람
이 없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