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충신(조선시대) ▶장포 이효원 ▷청양읍 장승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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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청양문화원 | 등록일 | 2002-05-20 | 조회 | 10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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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개> 뒷산에 대사간(大司諫) 이효원(李效元)의 묘가 있
다. 그는 자(子)는 성백(誠白)이고 호는 장포(長浦)이며 보관은 함 평(咸平)이다. 우윤(右尹)을 지낸 이관(李瓘)의 아들로 1584년에 문과에 급제 하고 임진왜란때 큰 공을 세워 종일등공훈(從一等功勳)을 세워 포상을 받을 만큼 뛰어난 인재였다. 왜군이 침략하여 들어와서 동래에서 부사의 죽음이 알려졌을때 는 자취를 감추고 집에 들어 앉아서 슬픔을 견디지 못해 이불을 쓰고 울면서 원수를 쳐부술 분노에 누을 부릅뜨기도 하고 탄금대 에서 신립장군이 전패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였을때 분노를 참다 못해 그래 일국의 장수가 전세의 판단도 못하고 탄금대에 진을 치고 군사들을 개죽음 시킨단 말이요하고 울화에 치미른 분풀이 를 하듯 상관들의 전략을 나무랬고 한사람람의 목숨이 나라 안에 선 황금보다 귀중하거늘 군사들을 장비도 없이 내보내서 싸음을 시킨다면 군사들의 목숨을 아끼여 적을 무찌르는 방법을 모색해 야 하지 않겠소 그래 탄금대 모래사장에 군사를 풀어놓고 때를 기다리는 전략이 군략이요 하며 상관들에게 대드는 사람도 그였 다. 그는 그만치 자기의 목숨이 아깝듯이 군사들의 목숨을 귀중 하게 생각하였기에 그와 같이 있기를 원하는 군사들고 많았으니 그래서 선조때의 속담에 죽어도 왜죽나 알고나 죽어야지 이좌랑 (李佐郞)이 죽으라면 죽을만 하지라는 말이 군사들간에 떠돌았 다 는 말이 있다시피 앞뒤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리에 밝아서 선조가 의주로 피난갈때 왕자들이 흩어져서 피난길에 오 르도록 진언하는 조정의 충신들께 하나만 알지 둘을 모르는 벼술 꾼들이라고 불평을 토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한편으로는 조 정의 일부 충신들께 미움도 샀지만 정말 당당했었다. 그가 이끄 는 군사들은 선조가 피난갈때 뒤를 지키는 군사들이었다.파도처 럼 밀려오는 왜적들을 산에 숨었다가 적병의 진중 깊숙히 들어가 서 적을 무찌르고 교란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무패의 장수였기에 선조는 몇번이고 칭찬을 하며 그에게 포상을 내리게 한것이다. 그는 선조말엽을 끝으로 벼슬길에서 어려움을 격게 되는 광해 군초에 옳고 그름을 잘 직언하는 그는 광해군에 의해 사직되고 유배되었다. 그는 유배지에서 말하기를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서 벼슬길에 오름이 전부가 아니고 사람이 일생을 사는 것은 어 떻게 바른 자세로 사느냐가 문제임을 말하였다. 문인이면서 무 인 못지 않게 그가 자기의 뜻만을 옳다고 아야기하는 것은 자기 가 천학함을 드러내는 것이고 문인이라 하더라도 나라의 위급함 에 사람만 부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몸을 국난에 던지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 하여 당시의 문인들께 일침도 가하 며 자기보다 남의 아픔을 먼저 아는 자 만이 옳은 정사를 할 수 있음을 역설하니 그는 가르켜 사람들은 말하기를 예학에 뛰어난 인물로 말하며 그를 칭찬하였다. 유배지에서 광해군의 정사를 하나하나 눈익혀 보면서 정사하는 것이 아니라고 근심을 하니 그 거ㅓㅅ은 그가 벼슬길에 다시 오름을 엿보는것이 아니라 그가 말 한대로 나라안의 여러가지가 어려워짐으로 근심한 나머지 실토하 는 그의 직언이었다. 그후 광해군16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나서 그는유배지에서 풀려 다시 벼슬길에 올라 이조참판에 올랐으나 얼마 안가서 청양군 장포에 은거했다. 그가 이곳에 내려오자 조 정에서는 더욱 그에게 벼슬길에 오를 것을 간청하였다. 그때마 다 이효원은말하기를 나라가 앞으로 더욱 미묘한 일로 여러가지 어려운 일을 격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국난보다 더 어려운 고비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하고 청나라의 움 직임을 점쳤고 또한 사람의 욕심이 벼슬길에 한하여 위로만 보 는 자들이 또한 작당되기 쉬운데 자칫 그런일이 일어나서 나라 가 시끄러우니 그는 아는 여러 조정의 사람들이 더욱 그를 아쉬 워 했다. 그는 장포에 내려와 책과 산수를 벗하면서 노년을 정 말 인생을 즐기니 그와 같이 살지 못하다 벼슬길에만 급급했던 사람들이 그를 더욱 높이 사사 이효원의 명성을 더욱 방방곡곡 에 알려졌었다. 선비답게 살다가 죽은 이효원은 뒤에 함풍군으로 모셔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