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독립유공자 ▶간호 안창식 ▷화성면 신정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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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청양문화원 | 등록일 | 2002-05-27 | 조회 | 11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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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생 지:충남 청양군 화성면 신정리 334
▶생년월일:1838년 3월 20일생 1899년 10월 30일 서거 ▶본 관:순흥(順興) ▶자(子):백경(伯卿) ▶호(號):간호(艮湖) ▶가 계: 시조 휘(諱) 子美의 25대손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22대손 ▶가족관계: 부친 진사공(進士公) 용(溶)과 모친 전주 이(李) 씨 사이에 장남으로 출생 . 성품은 쾌활, 의리에 강하시었음 ▶제(悌):정식(鼎植) ▶자(子):병찬(炳瓚),병림(炳琳),병수,병기(炳璣) ▶학 력: 부친께 수학, 사서삼경에 능하였음. ▶의거운동 ⊙1895년 9월 박창노(朴昌魯),이봉학(李鳳學), 이세영(李世永)등의 제인 사(諸人士)와 같이 긴밀한 의거계획을 수립 후 광호지방(廣湖 地方)을 여러차례 왕례하면서 모집활동. ⊙1896년 1월 13일 김복한(金福漢)을 총수로 모시고 장남 병찬(炳瓚), 채광묵(蔡 光默)과 같이 향병(鄕兵)180명을 인솔하여 홍주성(洪州城)밖 에 유진(留陳) ⊙1896년 1월 18일 모의가 순조로이 진행되던 중 돌변한 이승우 목사의 배신으로 주모자급 23명 피검 ⊙1896년 2월 24일 압송하고자 구속자 전원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자 비로소 부자 상 봉을 하게 되었는데 부친왈 ''만약 한꺼번에 극형을 받게 할 수 없지만 혹시 택하여 처형을 한다면 내가 죽고 너는 살아야 한다''고 하시었는데 병찬이 아버지께 고했다. ''의(義)를 지키다 죽는 것이 소자의 숙원이오니 아버님께서 마음을 너그럽게 가지시고 과히 염려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옆에서 이설 선생이 이 광경을 바라보며 ''부자가 서로 죽음 을 다투니 어찌 저 옛날 공씨(孔氏)형제와 같은가''탄식하여 말했다. 이들을 서울로 압송하고자 예산군 신례원까지 갔다가 시국이 돌변하였다는 연락을 받고 되돌아 왔다. 한달 가량 지난 후 다시 구속 23명 중 6명만 서울로 압송되고 나머지 17명의 의 사들께서는 흥주감옥에 유치되었다가 서울에서 육(六)의사가 특지 ( 特旨)로 석방되는 동시에 특명으로 지체없이 석방되고 경과 를 보고하라는 지시에 의해 석방되었다. 그후 향리에서 은거 망국의 한을 풀지 못하시고 항시 국가 의 장래를 걱정하시었고 두 아들과 같이 삼주자분이 국권을 수호 하고자 진충갈력하시었으니 이 어찌 흔하다 하리오 62세를 일기로 기세(棄世)하시었다. ⊙1990년 12월 26일 정부에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간호 안창식 묘소 청양군 화성면 화강리 대야골에 있다. ▶간호 안창식 묘비문 명왈(銘曰) 구봉의 우뚝함이여 청다(靑茶)의 푸르름이여 우렁찬 고함소리 홍주성을 울리니 간신들이 떨었고 초목도 울리니 불타는 충의 일념 열렬한 민족정기 해가되고 달이되어 천추에 빛나리 구봉(九峰)의 빼어남이여 청다의 청다의 푸르름이여 의열을 생명으로 죽음을 앞장서니 이들이 따랐고 문도들이 따랐다 하늘 높이 솟은 송백 남기신 높은 교훈 가슴깊이 새기여 만인이 숭앙하리 ※1983년 4월 30일 청뢰 이강훈 짓고 죽봉 황성현 쓰고 청양군수 김홍태가 세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