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독립유공자 ▶안항식 ▷화성면 기덕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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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청양문화원 | 등록일 | 2002-05-27 | 조회 | 10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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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항식 열사는 1860년 11월 24일 충남 화성면 기덕리에서 문성공 안향의 22대손으로 탄생하시었다.안의사는 1906년 4월 26일 을사보호조약이 끝내 체결되자 나라를 구하는 일에 나설 것을 결심하고 선비들을 규합. 의병을 일으켜 그해 5월 홍주성을 점령한 왜구드를 격파하고 성을 탈환하는혁혁한 전과를 기록했다.그러나 대포 등 중화기로 무장한채 전열을 가다듬어 대규모 반격에 나선 왜구들을 거의 육탄방어 수준인 의병으로써는 중과부적생포되는 배운을 겪으셨다. 선생은 그해 6월 19일 동료 8명과함께 일본 헌병에 의해 다마도로 유배되어 옥고를 치루었다.면암 최익현선생등이 잇따라 구금되어 함께 유배생활을 하면서온갖 고난과 고초에도 굴함이 없이 구국의 일념을 지켜 때로는단식으로 왜구를 꾸짖고 때로는 한국인의 초연한 기상을 보여주면서 아침 저녁 조국을 향한 망배(望拜)를 행하시어 그들의 존경을 받기도 하였다.왜구들은 선생의 충성심을 꺾기 위해 한편 설득하고 음으로 양으로 회유하려 했으나 강직한 충절을 끝내 굽히지 않으셨다.면암 선생등과 함께 충절의 시을 읽고 충성심을 키우다가 1910년 항일합방으로 옥고 4년만에 사슬에서 풀려나 조국의 품에 돌아오셨다. 선생은 대마도에서 얻은 병마와 싸우면서 망국의 한을 책으로 달래며 두문불출 하시다가 뜻을 세워 후학양성에 힘었다. 선생은 옥고에서 풀려난지 12년만인 1922년 5월 20일 향년63세로 일생을 마치시었다. 선생은 많은 후학들의 귀감으로남아 오랫동안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더니 그 후학마저 거의 세상을 떠너 선생의 풍모를 들을 수 조차 없이 되었다. 그리고 선생의 대마도에서 쓰신 대마도일기는 오랫동안 보존돼 오다가 6.25전란중에 분실되어 찾을 길이 없어 후손들을 안타깝게하고 있다. 정부는 구국의 일념으로 평생을 살아오신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1990년 12월 26일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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