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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규당 안병찬 ▷화성면 신정리 게시판 상세보기

[청양문화원] - 인물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독립유공자 ▶규당 안병찬 ▷화성면 신정리
작성자 청양문화원 등록일 2002-05-28 조회 1131
첨부  
 
▶출 생 : 충남 청양군 화성면 신정리 334(청대골)
▶생몰년월 : 1854년 5월 3일 1929년 6월 2일 서거
▶본 관 : 순흥(順興)
▶자(字) : 치규(穉圭)
▶호(號) : 규당(規堂)
▶가계 및 : 시조(始祖) 安子美26대손. 文成公 안향의 23대손
가족관계 : 부친 창식(昌植)과 모친 파평(坡平)윤씨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
모친께서 방안에 사광(瑞光)이 가득한 꿈을 꾸시
고 새벽에 출생.
가슴에는 북두칠성 모양의 흑점이 7개 있음
제(第):병림(炳琳),병수(炳琇),병찬(炳瓚)
자(子):형노(衡老),석노(奭老)
▶학 력 : 조부 진사공(祖父 進士公)께 수학
10세에 사서삼경 통독
1892년(임진「任辰」) 과거에 응하셨는데 조정기

의 문란함을 탄식, 과거장을 박차고 나오셨음.
홍주향교(洪州鄕校)교수(敎授) (典校).
▶의거운동
⊙1896년 1월 13일(음95. 11.29)김복한(金福漢)과 부친 안창
식, 채과묵과 같이 180명의 의병을 인솔 홍주성 밖에 유진(留
陳)

⊙1896년 1월 18일(음95. 12. 4)의거가 계획대로 진행되던 진
행차에 이승우 목사의 돌연한 배반으로 주모급 23명 피검(부자
같이 피검) 옥중에서 스스로 칼로 목을 찔러 인사불성이 됨시
었음.

⊙1896년 1월 19일 깨어 나시어 목에서 흐르는 피로 문종이에
혈서를 써서 목사에게 전하게 하시었음.

⊙1896년 2월 12일(음95. 12. 29)서울로 압송코저 홍주를 출
발하여 예산군 신례원에 도착했을때 돌변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다음 날 홍주로 되돌아와 재수감되었다가 2월 2일(음1. 12)다
시 압송하라는 지시를 받고 육의사만 서울로 압송

※육의사:김복한.이설.이상린.송병직.안병찬.홍건

⊙1896년 3월 20일 고등재판소 공사(재판정에서의 진술)나는
시골에 살면서 책을 읽어 의리에 대하여 조금을 알고 있다..작
년 8월에 있었던 국변 이후로 분통찬 마을을 머금고 궁하게 살
면서 스스로 부르짖어 울음을 계속해 왔다. 그런데 12월 단발
의 명령이 내렸으니 사람과 짐승의 구분도 없고 문화인과 오랑캐
의 구별도 없어졌다. 내가 비록 우매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일들
이 흉당의 협박과 강요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
서 스스로 자기의 힘을 헤아리지 않고 김복한 등과 더불어 의거
를 일으키기로 합의 하였으니 이것이 옛날에 비춰봐도 일대 의리
요. 지금에 있어서도 일대 의리입니다.
살아서도 의리이며 죽어서도 의리입니다. 그리하여 이드를 성
토하고 보복하려 하였는데 성사도 하기전에 실패로 돌아가서
홍주에 체포 되었으니 그날이 바로 흉악배가 일을 꾸민 날이었
습니다. 스스로 목을 찔렀으나 죽지않고 여기에 이르러 오늘
날을 볼수 있게 되었으니 만번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러나 특
지(特旨)로 석방 홍주감옥에 구금된 17명의 의사도 특명에 의
해 석방.
⊙1906년 3월 14일(음200민종식을 총수로 모시고 병오1차 의병
기의 행군사마로 주도적 역할 담당.
모병을 위한 통문까지 발송
예산군 광시면 하장대리 장터에서 천제를 지내고 발대식을 거
행 보무도 당당히 발진하여 홍주 하우령에 유진 홍주성을 공략
하고자 하였으나 목사 이교석이 일군과 합동 완강히 저항하므
로 부득이 홍주에서 퇴각 광시를 거쳐 남포를 공격하고자 청양
군 화성면 산정리 합천에서 유숙중 왜적의 야습으로 격전하다 패
하여 대분분의 의병은 해산되고 안병찬 박창노외 수백명이 피검
되었으나 거의 훈방되고 안병찬, 박창노는 공주 감옥으로 이송
2개월간의 옥고 끝에 박창노는 공주에서 석방되고 안병찬은 서
울로 압송되었다가 특지로 석방.

⊙1906년 5월 9일(음4.16)병오 2차 부여군 내산면 지티리에서
발대식을 올리고 출진하여 홍산, 서천. 남포. 보령을 차례로 점
령 최후위 목표인 홍주성까지 점령.안병찬는 출감하자마자
불편하신 몸을 이끌고 참모역을 맡아 활동

⊙1919년 3월 김복한과 같이 파리장서에 서명
6월초 피검되시어 공주감옥을 거쳐 대구로 이송. 5일간 단식
투쟁으로 뜻을 굽히지 않으시고 수개월간 옥고후 석방

※1919년 3.1운동전 규당 안병찬과 한국 유림대표 137인은 비
밀리에 한국독립 청원서을 만들어 제1차 세계대전의 처리를 위
해 파리에서 개최된 국제 평화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제출. 한
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의거후 5회에 걸쳐 가옥한 옥고를 치르시고 그후 감찰의 눈
이 끊이지 않았으나 향리에 은거. 망국의 비분에 세상과 두절.
향리에서 후학교육에 힘쓰시다 1929년 6월 2일 76세의 일기로
기세하시었다. 입관시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으니 하늘도 슬퍼
한것이리라.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