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기자의 아버지 ▶박관용 ▷운곡면 위라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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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청양문화원 | 등록일 | 2002-05-29 | 조회 | 2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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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의 구기자의 본고장이 되게한 『청양구지자의 아버지』 『청
양구기자의 시원자』로 일컬어지고 있는 박관용 선생은 청양 구 기자를 최초로 재배 정착시킨 역사적인 인물이다. 『청양이 구기자의 본고장이 된 유래』라는 소책자가 박택재씨 에 의해 정리. 발간되기도 했었다. 평생을 구기자와 함께 살아온 선생은 인류 구제의 영약인 구기자 로 불로장생하고 인삼을 능가하는 세계적인 특산물로 발전시켜 복지농촌을 이루겠다는 굳은 의지로 청양구지가를 탄생시켰다. 80여년전 야생구기자를 발굴 재배를 시작했고 시험장을 설립 연 구하며 특화작목으로 정착을 시도했다. 지역민은 물론이고 전국 을 순회하며 구기자 재배를 호소했고 중국등을 방문하여 청양구 기자의 세계화를 추진하기도 했다. 구기자를 발전시키는 것은 인류를 구제하는 일이라는 소신으로 『구기자에 미친 사람』이라 는 별명을 들으며 구기자와 함께 살아온 박관용 선생의 활동내용 은 다음과 같다. 박관용 선생은 운곡면 위라리에서 1908년에 태어났다. 1922년 경15세때 집 울타리에 하얀색 나무줄기에 빨간 열매가 열리는 것을 보고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 이름이 구기자이며 약으 로 쓰이고 가을에 상인들이 고가로 사간다는 말을 듣고 이것을 재배하면 농촌이 부자가 되겠구나 생각하고 구기자 재배법을 연 구하기 시작했다. 이곳 저곳에서 재배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구기자 묘목을 채취하여 시험재배를 시작하고 우수종자를 찾아내 어 개량하는 한편 어떤 거름을 주면 잘 크고 거름주는 시기는 언 제가 좋은지를 알아보는 등 이 고장의 토양과 기후에 맞게 기른 는 법을 연구해 나갔다. 당시에 주의 사람들은 선생을 구기자 에 미친 젊은이란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몇년의 시험재배 끝 에 마침내 당시 농촌에서는 상상할수도 없는 높은 소득을 올리 게 되어 구기자를 심으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 었다. 이때 선생 나이 19세 되던 해로 300평의 구기자 밭에서 말린 구기자 170근을 수학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시가로 근당 1월 70전 총약 290원의 소득이었다. 당시 농지의 가격은 밭 한 평에 10-30전으로 그돈이면 구기자 심었던 밭을 여러곱 사고도 남는 돈을 얻었다. 그 다음해에는 780평을 심었는데 마른 구기 자4030근을 수학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선생은 청양군 목면 신 흥리 임장굴 마을을 『박관용 생약시험장』이라는 명칭으로 구기 자 연구와 재배를 본격화하여 그이후 6천평까지 확대 재배해 갔 다. 한편 박관용 선생은 구기자가 비싼 값에 팔려서 서울로 올 라가고 또한 이것을 중국으로 수출된다는 것에 착안하여 당시 서 울에 있는 중국 영사관에 문의한 결과 중국에서도 구기자가 생산 되지만 그 품질과 약효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이 월등히 좋 기 때문에 근당 1원 내외에 사들인 구기자가 무려 4-5원씩 수출 된다는 것을 알았고 따라 4억 인구가 있는 중국에 수출하면 많 은 수익이 가능한 것도 알게 되었다. 구기자 시험재배 초기에 는 주위에 대대적으로 장려하고 인근 농민들에게 구기자 심기 를 권유하여도 너나 없이 신통치 않게 생각했다. 심지어 밭을 무료로 빌려주면서까지 심으라고 권유해도 심는 사람이 없었 다. 그러나 시험재배가 성공하고 큰 소득이 있게되자 구기자를 심으면 부자가 된다는 소문이 퍼져 박관용 선생이 구기자를 시작 한지 7-8년 후인 1930년 이후에는 구기자를 심는 농가가 늘기 시작했다. 선생은 비록 일체치하였지만 유망한 산업을 장려하면 결국은 우 리 백성의 배를 불릴 수 있으므로 왜놈을 위한 산업장려가 아니 라 피폐한 농촌을 살리기 위해 서는 구기자를 재배하여야 한다 고 역설하는 한편 사비를 투자하여 구기자 심기 유인물을 제작 전국에 배포하고 신문에 약초를 심으면 이익이 있다고 광고를 하 기도 했다. 선생의 구기자 재배 성공담은 입에서 입으로 널리퍼 져 젊은이가 큰 일을 한다고 격려가 끊이지 않았으며 급기야는 경기도 강원도 경상도 등 각지에서 손님들이 찾아와 견학하는 사 람들이 어어졌고 진도를 비롯한 전국을 순회하며 구기자 재배 기 술을 지도하기도 했다. 선생은 그후 구기자 재배 결과가 밑거름 이 되어 서울로 진출하게 되었고 당시 한약업계에서 가장 규모 가 큰 회사인 (주)천일약업사와 합작하여 약초재배 및 판매회사 인 연수약업사를 창설하고 아울러 청양에서 생산된 구기자의 서 울 판도로 전담하다시피 했다. 이와 같이 평생을 복지농촌건설 과 불로장생의 건강한 삶을 염원하며 박관용 선생이 정열을 바쳐 온 청양구기자는 이제 세계속의 구기자로 발전하고 있다. ''금산 인삼보다 청양구기자가 더욱 뛰어나고 세계인류를 구제 할 수 있는 영약이므로 청양인 모두가 합심하여 세계속의 청양구 기자로 키워나가길 기대한다''며 뜻있는 젊은이들이 내가 못다 이룬 꿈을 꼭 이루어 주길 소망한다''고 박관용 선생은 강조 했 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