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충신(의병대장) ▶ 최익현▶목면 송암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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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청양문화원 | 등록일 | 2002-06-19 | 조회 | 1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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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崔益鉉, 1833~1906)】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지사(志士) ▶본관: 경주(慶州) ▶자:찬겸(贊謙) ▶호:면암(勉庵) ▶경기 포천(抱川) 출생. ▶김기현(金琦鉉)이항로(李恒老)등의 문인(門人). 1855년(철종 6) 정시문과 에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 ·사헌부 지평(持平)·사간원정언(正言)·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수봉관·지방관·언관 등을 역임하며 강직성 을 드러내 불의·부정을 척결하여, 관명을 날리고, 68년(고종 5) 경복궁 중건의 중지, 당백전(當百錢) 발행에 따르는 재정 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실정(失政)을 상 소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73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기용되자 명성황후(明成皇后) 측근 등 반(反)흥선 세력과 제휴, 서원(書院) 철폐 등 대원군의 정책 을 비판하는 상소를 하고, 호조참판으로 승진되자 다시 대원군 의 실정 사례를 낱낱이 열거, 왕의 친정(親政), 대원군의 퇴출 을 노골적으로 주장함으로써,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 들었으나, 군부(君父)를 논박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형식상 제 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75년에 풀려났다. 이듬해 명성황후 척족정권이 일본과의 통상을 논의하자 5조(條)로 된 격렬한 척사소(斥邪疏)를 올려 조약체결의 불가함을 역설하다 가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되었으며 79년 석방되었다. 95년에는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이를 반대하다 투옥되었 다. 98년(광무 2)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이 되고 뒤에 중 추원의관(中樞院議官)·의정부 찬정(贊政)·경기도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향리에서 후진교육에 진력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고종의 밀지를 받고 상경, 왕의 자문에 응하였고 일본으로부터의 차관 (借款) 금지, 외국에 대한 의부심(倚附心) 금지 등을 상소하 여 친일 매국도배들의 처단을 강력히 요구하다가 두 차례나 일 본 헌병들에 의해 향리로 압송당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 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경을 토로하 고, 8도 사민(士民)에게 포고문을 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며 납 세 거부, 철도 이용 안 하기, 일체의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 항 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 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 >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일 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 체포되어 쓰시마섬[對馬島]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敵)이 주는 것이 라하여 거절, 단식을 계속하다가 유소(遺疏)를 구술(口述), 임 병찬에게 초(抄)하여 올리게 한 뒤 굶어죽었다. 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문집에 《면암집(勉庵集)》 (합 48권)이 있다 ▶문화재 자료152호로 지정된 모덕사는 조선시대말 대학자이며 의병대장인 최익현 선생의 항일투쟁과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1914년에 창건한 사당이다. 선생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유품도 전시되어 있다. 고택 . 중화당과장서각. 영당. 춘추각 유물전시관이외에 관리사 무소가 있다.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항일운동을 펼친 선생의 불타는 충정을 다 시금 생각할 수 있는 곳이다. 우목저수지와 어물어져 경관이 아 름답다. 매년 4월 13일 항일의거기념 면암선생추모제가 청양군 목면 송암리에 있는 모덕사에서 열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