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충신(조선후기) ▶번암 채제공 ▷화성면 구재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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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청양문화원 | 등록일 | 2002-06-19 | 조회 | 11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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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제공(蔡濟恭) [1720 ∼ 1790]】
▶조선 후기의 문신. ▶자:백규(伯規) ▶호:번암(樊巖) 번옹(樊翁) ▶시호:문숙(文肅) 지중추부사 채응일의 아들. 오광운(吳光運)과 강박(姜樸)에게 배웠다. 1743년(영조1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정자를 거쳐 수 찬 교리를 지냈다. 1753년 호서암행어사가 되었고, 1758년 도승지로 <열성지장 (列聖誌狀)>의 편찬에 참여했다. 이어 한성부 우윤, 예조참판, 병조판서 등을 역임. 1771년 호조판서로 동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고, 그 후 평안도 관찰사, 예조판서를 지냈다. 1776년(정조즉위) 형조와 병조의 판서를 지낸 뒤, 1780년 홍국영(洪國榮)의 세도정치가 무너지자 정치, 경제, 문 화, 사회등 각분야에 걸쳐 왕을 도와 충실하게 보필했 다. 이어 규장각 제학,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후 1788년 우의정을 거쳐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다. 1790년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신서파의 영수로서 공서파에 맞서 천주교신봉의 묵인을 주장했으며, 그 후 여러 차례 공서파에 의해 삭직, 유배 등의 처벌을 받았으나 정조의 특별한 신임으로 곧 등용되어 천주교 처리문제를 위임받아 온건정책을 유지, 1793년 영의정에까지 오르는 등 10여년간 재상으로 있는 동안에 는 천주교 박해가 확대되지 않았다. 판중추부사로 죽었다. 중추부지사 응일(膺一)의 아들. 오광운(吳光運)과 강박(姜樸) 에게 배웠다. 1735년(영조 11) 15세에 향시에 급제한 후 43년에 문과정시를 통해 승문원에 들어갔다. 1748년 영조의 특명에 의해 탕평책의 제도적 장치인 한림회권 (翰林會圈)에 뽑혀 예문관 사관이 됨으로써 정통 관료로 성장하 였다. 1751년에는 중인(中人)의 묘소를 빼앗았다 하여 삼척에 유배되 기도 하였으나, 1753년에 균역법 운영상황을 조사하는 충청도 암행어사, 1755년에 나주괘서사건을 조사하는 문사랑(問査郞) 으로 활동하였고 부승지 ·이천부사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758년 도승지가 되었는데, 사도세자를 미워한 영조가 세자를 폐위하는 명령을 내리자 죽음을 무릅쓰고 건의하여 철회시켰 다. 그 후 대사헌 ·예문관과 홍문관의 제학 등 언론과 학문의 관 직, 경기감사 ·개성유수 ·안악군수 ·함경감사 ·한성판윤 등 의 지역 행정직, 비변사당상과 병조 ·예조 ·호조의 판서 등 중앙 정치 ·행정직을 두루 역임하는 한편 1771년에는 동지사 로 중국에도 다녀온 후, 1772년부터는 세손우빈객으로 세손의 교육에참여하고, 공시당상(貢市堂上)으로 경제활동을 관할하였 다. 이후 호조판서 ·좌참찬을 지냈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형조판서 겸 의금부판사로서 사도세자 의 죽음에 관여한 자들을 처단하는 일을 처리한 후, 공노비의 폐단을 바로잡는 절목을 마련하는 등 국왕의 정책을 보필하였 다. 규장각제학 ·예문관제학 ·한성판윤 ·강화유수를 역임하였으 나 1780년(정조 4) 홍국영(洪國榮)이 실각할 때 그와 친하고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장하여 선왕의 정책을 부정했다는 등의 공 격을 받아 이후 서울 근교 명덕산에서 8년간 은거생활을 하였 다. 1788년 정조의 특명에 의해 우의정이 되었으며 2년 후 좌의정으 로 승진하면서 3년간 혼자 정승을 맡아 국정을 운영하였다. 1793년에 한때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그 후로는 주로 수원성 축성을 담당하였다. 죽은 뒤 1801년(순조 1)에 노론 벽파(僻派)에 의해 추탈관작되 었다가 1823년에 영남인들의 요청이 받아들여져 신원되었다. 영조대에 활동한 스승 오광운을 이은 남인, 특히 청남(淸南) 계 열의 지도자로서 사도세자를 신원하여야 한다는 등 자기 정파의 주장을 충실히 지키면서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인 인물 이었다. 그것은 목숨을 걸고 사도세자를 보호한 일이 계기가 되어, 영조 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후회하여 기록한 <금등(金)>을 정조와 함 께 보관할 유일한 신하로 채택될 만큼 두 국왕의 깊은 신임을 받 았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노론 출신으로 정조의 탕평책을 지지한 김종수(金鍾秀) ·윤시 동(尹蓍東)의 상대역이라 할 수 있다. 사도세자 문제에 대한 입장을 기준으로 정파를 나누면 시파(時 派)로 분류된다. 전반적인 사상이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음은 물론이지만, 당시의 주도세력인 서인 ·노론과는 여러 면에서 대비되는 주장 을 하였다. 정치체제는 노론들이 남송(南宋)을 내세웠던 것에 비해 강력한 왕권에 의한 통일국가를 유지한 전한(前漢)을 모범으로 하였 다. 천주교 ·불교 등을 이단으로 배격하였으나 정조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믿는 사람들을 제거하기보다는 교화의 대상으로 삼았 다. 정조 중반 이후 여러 차례 처벌받고, 죽은 뒤 관작을 뺏긴 데 는 천주교를 두둔했다는 것이 큰 구실이 되었다. 당시의 사회 모순들을 깊이 인식했으나 제도의 개혁보다는 운영 을 통해 해결하려 하였다. 상업보다 농업을 강조하였으며 1791년에 대상인의 특권을 폐지 하고 소상인의 활동 자유를 늘리는 조치인 신해통공(辛亥通共) 을 주도하였다. 한편, 사족 우위 및 적서(嫡庶) 구별을 엄히 함으로써 사회 안 정을 꾀하려는 보수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이가환(李家煥) ·정약용(丁若鏞) 등으로 이어졌으며, 사후에도 남인들 사이에 확고한 권위가 유지되어 19세기 순조 연간 세도정치 아래에서 남인들의 정치적 발언은 그를신원해야 한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하였다. 문집으로 《번암집》이 있다. ▶청양군 화성면 구재리의 상의사는 번암 체제공 선생의 사당으 로 1989년 영당 및 내 외삼문. 1993년 제실 및 장판각을 건립 하여다. 영당에는 유형문화재 제130호로 지정된 영정을 안치하 고있으며 가을에 제향을 지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