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효자 ▶양차원 ▷대치면 광금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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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청양문화원 | 등록일 | 2002-08-01 | 조회 | 10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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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양차원은 1778년 (正祖元年)에 청양군 대치면 광금리에서
출생하여 1823년에 45세로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모시기를 하늘같이 모셨고 친구들과 사귈때도 정으로 사귀니 그와 한번 만난 사람들은 그를 떠나지 않았다 한다. 항시 생각이 많은 사람으로서 심지어 부모님 밥상 에 오를 반찬까지 끼니마다 걱정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래서 마을 에서는 그를 가르쳐 백년에 한번 만나 볼 수 있는 효자라고 말하 였었다. 그의 효성도 아랑곳 없이 하루는 어머니가 시름시름 앓 더니 그만 어머니는 괴질에 걸려 병석에 아주 눕게 되었다. 어 머 니가 병환에서 고생하는 것도 모두가 자식인 자기의 불효탓이라 고 생각한 그는 어머니 병환 고치기에 온갖 정성을 다했었다. 공주에 유명한 한의가 있다면 공주에 다녀왔고 심지어 한양까 지 가서 약을 구해다가 어머니에게 정성을 다 하였는데도 어머 니 병환은 낫지가 않았다 세상에 어지간한 병이면은 어머니가 일 어나서 돌아다니실 텐데 하고 생각하니 더욱 가슴이 아팠다. 하 루는 한 한의를 찾아가선 어머니 병환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한 즉 그 병에는 사람의 고기가 좋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였다. 세 상 에 사람병을 고치는데 사람의 고기가 좋겠다고 말을 하는 것이였 다. 세상에 사람병을 고치는데 사람의 고기가 필요하느냐고 물 어 본 즉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의 고기가 약효가 있다 하니 그는 그 렇다면 약은 구하기가 어렵지 않다고 약방을 뛰쳐 나와 집에 돌 아와선 자기 오른쪽 허벅지 살을 베어 약을 해드리는 것이었 다. 자식이란 항시 부모의 슬하에서 자라는 것이므로 어찌 부모의 병 을 고치는데 자신의 살을 베어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고 그는 쩔룩거리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딱하게 또는 가련하게 생각 지도 않는 그였다. 사람의 살을 베어 약을 써보라 하여서 그는 어머니 병환에 그리 해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니 오히 려 어머니 병환은 더욱 심해갈 뿐이었다. 그 후 아버지가 또 병 환에 눕게 되었다. 아버지 병환에 이번에는 자신의 왼쪽 허벅 지 살을 베어서 약으로 썼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양쪽 허벅지 살 은 모두 베어서 약을 했었다. 그의 허벅지 살을 베어서 약을 했 지만 역시 아버지 병혼에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방에 는 병환에 시달린 아버지가 누워 있었다. 이번에는 아버지 병환에 잉어를 한마리 약을 써보라고 약제를 가르켜 준다. 그는 허벅지 가 아물지도 않았는데 잉어를 잡기 위해 집에서 나온다. 엄동 설 한이라 여기 저기 땅이 꽁꽁 얼어 붙었고 바람만 요란하게 분 다. 허나 아버지 병환에 잉어가 약이라는데 그잉어를 자식이 구 해드리지 못하면 얼마나 불효한 짓인가 생각하며 잉어가 많이 있 다는 못 위로 아픈 다리를 이끌고 나갔다. 그리고 꽁꽁 얼어붙 은 얼음덩어리 빙판을 깨고 그 속에 낚시를 가라앉힌 다름 쭈그 리고 앉는 것이였다. 그리고선 눈을 지긋이 감고 천신께 기도 를 한다.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 병환에 잉어가 약이라 하옵니다. 잉어 한 마리만 잡히게 하여 주십시요. 잉어를 잡수시면 아버지 병환이 완쾌된다 하옵니다. 하나님 천신님 이 가련한 불효자식이 효도 를 할 수 있도록 잉어 한마리만 내려 주십옵소서 그가 하늘을 바라보고 기도를 하고 있는데 잉어가 낚시에 걸린 게 아니라 그가 깬 몰구멍으로 한마리가 불쑥 튀어 나오다니 빙 판위에서 이리 저리 뛴다. 그는 천신이 자기를 돕는다고 생각하 고 잉어를 잡아들고선 집으로 돌아와서 약단지에 잉어를 고아서 아버지께 드렸다. 이번에는 천신께서 잉어까지 내리셨으니 아버 지 병환이 문제없이 나아지겠지 하고 혼지 기뻐하고 있는데 그 잉어를 먹고 3일동안 건전하고 병환에서 건강이 회복되는 것 같 더니 3일후에 아버지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영면하시는 것이었 다. 부모님을 병환에서 구출하기 위해 지식된 도리로서 별일을 다 해봤지만 인명은 천명이였던지 소용없는 일이였다. 그는 쩔룩거 리며 아버지 마저 묘지에 모시고는 기진맥지했는지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이와 같이 자식으로서 부모님을 모시는 정성 이 참으로 눈물겹도록 귀감이 됨으로 그의 효행은 잠깐 사이에 전국에 퍼져나갔다. 그의 효행은 드디어 나라의 임금께 알려지 가 당시의 임금님이신 고종께서 정무을 내리고 그의 효행을 영구 히 후세에 남기도록 하시니 그 정문이 처음은 청양군 대치면 광 금리에 세웠으나 그후 증손인 양해준이 정산면 서정리 입구에 옮 겨 세우고 처음 정문이 내리 대치면 광금리에는 비석만 남겨 놓 았다. 부모를 위해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오직 효행을 위 해 서 산 거룩한 정문이 바로 이 정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