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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 권흥규 게시판 상세보기

[청양문화원] - 인물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의사 ▶ 권흥규
작성자 청양문화원 등록일 2004-05-20 조회 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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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만세 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 메아리 칠때 민족적 울분
을 참지 못하여 항거하다 숨을 거두신 의사는 민족적 의기를 드
높인 민족의 횃불이시다.
의사 권흥규는 청양군 목면 안심리 건지동에서 가난한 선비의 아
들로 1860년(철종11년)에 태어났다.
선생은 정산향교 직원을 역임하면서 향리에 사당을 차리고 후배
양성에 진력했었다.
이른바 성품이 강직하였고 즐겨 익히는 선비였다.
기미년 독립만세 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 메아리칠때, 선생께서
는 정산 장날을 기해서 분연 기꺼히 앞장을 서서 자주독립을 외
쳤다. 독립만세를 외치는 그에게 일본 헌병을 총탄을 퍼부었고
그는 제자리에 쓸어졌다. 놈들의 발악적인 흉탄에 쓸어진 것이
바로 1919년 4월5일(음 3월5일)의사의 나이 60이 되던 해였다.
1919년 4월 5일은 앞서 말했듯이 정산 장날이었다.
선생께서는 의거의 계획이 끝나면서는 다시 집에 돌아오지 못할
것을 스스로 단정하고 굶주릴 가족들을 생각해서 쌀 한말을 마련
하여 집에 두고 아침 일찍이 장터로 나갔다.
장터에는 아침나절부터 사람이 우굴우굴 모여들기 시작했다. 많
은 군중이 모여진 그 앞에 선생은 초연히 나타나 대한 독립 만세
를 선창하고 수 많은 군중들의 앞장서서 헌병 보초소 앞에 이르
면서 "일본인은 물러가라"고 고함치며 "대한독립만세!"하고 외치
는 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일제의 그들은 갑작스런 항쟁에 놀라 공포를 쏘아댔으나 군중들
은 좀처럼 후퇴할 줄을 몰랐다. 사태가 급박함을 절감한 헌병들
은 선생의 가슴에 총을 겨누면서 죽인다는 위협이었으나 선생
은 "쏠테면 쏴라"하고 가슴을 헤치며 달겨들자 놈들은 일제히 총
을 쏘았고 선생은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마침 저녁때가 되면서도 소나기가 쏟아져 장안은 엉망진창이 돼
버렸다 이튿날 영구가 집으로 무언의 죽엄으로 돌아오면서 여
러 마을에서 쏟아져나온 조객들로 해서 행렬은 밤늦게까지 계속
되어 횃불은 십리를 요소마다 밝혀야만 했다.
이러한 행렬이 놈들에게 알려지자 공주 헌병대에서 긴급 출동한
수십명의 헌병들이 쏘아대는 흉탄에 선생의 조카 딸과 최봉안,
유행길, 장의열, 윤광원, 김국삼등 여섯 사람이 쓰러졌고, 선생
의 따님은 적의 칼날을 잡고 반항을 하다 네 손가락이 잘라지기
까지 했다. 처참한 일이었다. 아니 민족의 일대 비극이었다.
이날밤도 어제와 같이 천둥이 울고 소나기가 퍼부어 장례도 제대
로 치루질 못했다.
그후 어느날 태극기를 만들고 "배일사"라는 명정을 쓴 친척되는
영진이란 사람도 놈들에게 체포되어 살해되었고 의사와 함께 선
두에서 만세를 외쳤던 홍범식, 홍세포, 임의재, 박상종, 윤석희
등 다섯분은 부산 지방법원에서 실형을 받고 옥살이를 했으며
160여명은 심한 고문 끝에 석방되었다.
그후 선생의 유족들은 고향을 떠났고 누구 한사람 묘소도 돌보는
이 없었다 한다.
온 겨레와 숱한 애국지사들의 희생이 조국 광복으로 해방을 맞이
한 1953년 정산중학교 교정(당시 총을 맞고 쓰러진 현장)에 자연
석으로 "기미 의사 권공 홍규 순열비"가 세워졌고 매년 3.1절에
는 이 자리에서 기념식을 올리고 목면 본의리 묘소에서는 제향
을 올린다.
1966년 당시 청양군수 전준기씨의 발기로 순열비 건립회를 조직
하여 군내 관민과 학생들의 성금으로 정산면사무소 앞에 순열비
를 다시 세우고 초라했던 1966년대의 묘소는 1981년에 복원 중수
하여 의사의 영혼을 편히 쉬도록 단장을 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오로지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초토처
럼 버리신 의사의 용기와 의지를 배우며 뒤따라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