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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투사 ▶ 김덕진 게시판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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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항일투사 ▶ 김덕진
작성자 청양문화원 등록일 2004-05-20 조회 692
첨부  
 
묘소 : 청양군 대치면 이화리.
을사조약의 체결로 말미암은 온 겨레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듯 충
전했을때, 김덕진도 솟아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여 솔선 의병
을 일으켜 민종식과 손은 맞잡아 홍주성 싸움에서 싸웠고 생애
를 조금도 굴하지 않은채 항일 운동에 앞장을 서오던 투철한 독
립투사다.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에서 독전어사로 활약하였으며 세자시강원
의 벼슬을 지냈던 김중일의 9세손으로 태어난 김덕진은 자를 경
명 호는 낙계라 했고 본관은 안동이다.
김덕진은 1865년(고종2년)충남 청양군 적곡면 낙지리에서 태어났
다.
어려서부터 불의를 보면 그대로 지나쳐버리지 않는 개성과 주체
성이 확고한 그는 반드시 정의의 편에 서는 위인이었다.
그의 나이가 40이 되던 1905년 우리나라는 일본의 강압에 눌려
치욕적인 을사보호 조약을 맺게 되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우리나
라의 모든 외교권과 자유를 일본의 손아귀로 들어가면서 무단(武
斷)통감(統監)정치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무단통감의 주인공 이또오는 고종황제가 병환으로 참석하지 못하
는 어전회의를 고의로 열게 하여 조약을 체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대신들을 한명씩 불러놓고 글자 그대로 강압 일변
으로 체결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치욕의 조약체결로 해서 시종무관장 민영환을 비롯하여 수많
은 애국지사가 자결하게 되었고 전국 방방곡곡에서는 연달아 의
병들이 궐기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민족의 절규요 정의였다.
투철한 애국정신이 그 누구에 되지지 않은 김덕진 그 자신도 분
노를 참을 길이 없어 당시 정산면 천장리에서 은거하며 때를 기
다리던 전 참관 민종식을 찾아가 자신의 뜻을 밝혀 동조하게 되
었고 이어서 정재호, 이세영, 박윤식, 이용규, 이상두등 쟁쟁한
애국 동지들과 함께 조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906년(고종43년)
에 드디어 의병을 일으켰다.
1906년 5월 19일에는 홍주성을 공격 할때 여기저기에서 몰려온
의병들로 실로 사기가 충천했다.
이무렵 서울에 있는 왜군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왜군소
좌 야마나까는 보병, 기병을 비롯해서 기관포와 헌병 1개중대를
이끌고 홍주성으로 처들어오게 되었다. 이에 덩달아 수원과 공주
에 있는 경찰대까지도 홍주성에 이르렀으니 진위대의 이기홍이라
는 자도 그들과 야합하여 일제히 쳐들어왔으니 10일간의 치열한
전투에서 왜병 30여명을 사살했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이었을
뿐, 기실은 왜군들의 지니고 있는 갖가지 무기와 잘 훈련된 전투
력에는 비장한 의병들로도 감당할 길이 없었다. 뛰어난 정신력
만 뛰어날뿐 행동이 잘 들어먹질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 치열
한 공방전에서 백여명의 의병들이 전사되었으며 70여명이 포로
를 가져왔으니 아아 하늘도 무심해라, 땅을 치며 통곡을 해도 시
원치 않은 약소민족의 크아큰 비애였다.
이 전투에서 용케 빠져나온 김덕진은 민종식등과 공주 탑산리에
있는 지난날의 참판이었던 이남규의 집에 숨어 있으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리던 중에 당시 충청도 관찰사로 있던 김가진에게 발각
되어 11월 20일 민종식을 위시한 1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왜놈
헌병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것은 물론 배신자인 김가진 때문이다
결국 김덕진은 민종식과 함께 진도로 유배되었다. 유배된 7개월
후에야 풀려나와 고향에 돌아와서도 나라 걱정으로 두문불출하면
서 짚신을 삼는 일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