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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 임정식 게시판 상세보기

[청양문화원] - 인물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의병 ▶ 임정식
작성자 청양문화원 등록일 2004-05-29 조회 768
첨부  
 
사당소재: 청양군 정산면 백곡리 두촌사
멀리 임진왜란 때 청양 정산에서 향병 백명을 일으켜 중봉조헌
휘하에 들어가 청주전투에 참전하여 봉사로 7백의사와 함께 순절
한 충신이다.
임정식이 출생한 해는 알 수 없으나 청양군 정산면 백곡리 백실
에서 살았으며 성품이 순박하고 정직하며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
수했었다.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쏟
아져나와 구국의 함성은 하늘을 찌를듯 산천초목도 떨었다. 이
에 빠질세라고 임정식은 자진하여 의병에 투신했다. 당시 왜적
은 부산을 거쳐 불과 19일만에 서울을 함락하자 임금은 의주로
몸을 피하고 다급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 무렵에 충청도 옥천에
서는 중봉조헌이는 도내에 격문을 보내고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
식을 들은 정식은 정산에 향병 100여명을 이끌고 조헌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는 출정에 앞서 자기집 뜰안에 있는 은행나무에 충
성어린 분개의 시를 새겼다는데 오늘날 그 흔적은 찾을 길이 없
으나 은행나무만은 하늘을 찌를듯이 치솟고 있다.
정식은 마지막으로 조상의 사당에 정중한 배례를 하고 엎드려
"선영이시여 제가 이제 나라를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출정하오
니 그리 아시옵고 만일에 왜적을 무찌르지 못하면 살아 돌아오
지 않겠나이다."
하고 비상한 각오로 집을 떠나 조헌의 휘하의 일원으로 이광륜
이려와 더불어 봉사하였고 이어 임진 8월1일 청주성 전투에 참전
하여 용맹을 떨쳤다. 다시 왜군은 조헌과 영국대사가 합동하여
청주성을 토벌하기로 결의한 끝에 청주성을 탈환하는데 성공했
다. 이에 의병들은 파천 임금님을 호위하기 위하여 북상코자 했
으나 관찰사 윤선각과 조헌과의 의논끝에 금산에 밀집된 적군부
터 무찌르기로 되었으나 의병중에서 왕을 모시자는 주장과 금산
정벌을 앞서 하자는 엇갈린 주장때문에 일부는 떨어져 나갔으
나, 임정식은 조헌과 끝까지 뜻을 같이하여 우선 전투 태세로 들
어갔다.
그러나 이쪽의 장비가 미진한데다 전라 감사겸 순찰사인 권율과
의 약속이 잘 지켜지지 않아 큰 고전을 겪어야만 했다.
결국 금산 싸움에서는 여러가지 불리한 여건으로 최우까지 적과
맞섰다.
임정식은 궁마지재가 있어서 적진으로 들어갔으나 조헌의 형세
가 매우 위태롭게 된 것을 보고 곧 말을 돌려 적중에 돌입하여
적병 수명을 단숨에 처치하고 그만 순직하고 말았다. 때는 8월
18일 무더운날 그는 7백의사의 한 사람으로 구국의 외줄기 신념
으로 싸우다 장열한 전사를 했다.
임정식의 시체는 7백의사와 나란히 묻혀져 조국의 평온과 변영
을 기원하고 있다.
1688년 숙종은 그의 충성을 높이 찬양하여 고향인 정산면 백곡
리 입구에 정려문을 세우게 했다. 또 그는 회인에 있는 후율사
에 향배되어 있고, 금산 종용사에 위패가 모셔져 있다.
1979년 이고장의 유림들이 두촌임충신 사우 건립추진회를 발족하
여 사당을 세우고 청양군에서는 1980년도에 사당앞에 삼문을 건
립하였다.
이곳에서는 매년 8월18일을 기하여 제향을 올리고 그분의 투철
한 충의정신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