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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부자 ▶ 채광묵*채규대 게시판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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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순국선열부자 ▶ 채광묵*채규대
작성자 청양문화원 등록일 2004-06-02 조회 765
첨부  
 
묘소 : 청양군 사양면 신왕리
1905년 일본이 강압적인 을사조약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모두들
자진하여 의병에 나서자 민종식의병장의 참모장이 되어 홍주성에
진격, 이와 함께 치열한 전투를 하다 장렬하게 전사한 부자가 있
으니 아버지는 채광묵 아들은 규대 부자다.
1850년(현종원년) 7월15일 홍주매평리에서 출생한 채광묵은 자
를 명숙이라 하고 호를 구연이라 했다. 본관은 평강이다.
어려서부터 성격이 강직하고 의와 용기로 뭉쳐진 굳은 신조는 옳
바른 일에는 추호도 양보없이 몸소 실천에 옮겼다. 그러한 강인
한 성격이면서도 시작에 능하여 당대에 이름을 떨쳤고 뭇 사람들
은 그를 화남선생이라 칭하기도 했다.
어리니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광묵은 1895년(고종32년) 을미사변
을 당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당시 우리나라 정세는 1894년 갑오경장이후 청일전쟁으로 혼란에
빠졌고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은 더욱 우리나라를 억압하기에 이
르렀다.
당시 일본공사 "미우라"를 앞세워 민비일파가 친로쪽으로 돌아가
자 국모를 시해하고, 제4차 김홍집 내각을 세우게 되었다.
이러하듯 나라 안팎이 어수선 해지고 국가의 안위가 흔들리게 도
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으니 채광묵도 고향인 청양에
서 의병을 규합하면서 나라의 혼란을 막기도 또는 항일투쟁에 선
봉에 나섰던 1895년 11월 29일에는 약180여명을 이끌고 홍주성
에 들어가 박창로, 안병찬등 동지들과 합세하여 의거할 것을 논
의, 자신이 참모장이 된후 군사 7,8백명이 거사에 참가했는데 김
복한, 이설, 이상진, 송병직, 이세영등도 이에 가세하게 이르렀
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었다,.
왜군들이 벌써 각지에 병참소가 설치돼 있는데다 일부 몰지각한
한국인 중에서 일본인에게 매수되어 사전 거사가 탄로되기도 했
었다. 밀고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속에 많은 애국지사가 끌리어가 옥고를 치루기도 했
다. 허나 채광묵이만은 용케도 큰 화를 모면하면서 10여차례나
서울에 드나들면서 토적하기를 상소했으니 그이 그 기백에 감동
한 조정에서는 그를 내부주사로 임명하였으나 그는 이를 거절했
다.
1905년(광무9년) 한일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으니 이를 제2차
한일 협약 을사조약 또는 한일 보호조약이라고도 하는데 이로써
일본은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하기에 이른 것이다. 보
다도 놀랄일은 우리나라에 통감정치가 설치되면서 더더욱 분노를
자아낸 채광묵은 1906년 민종식과 더불어 홍주성에 다시 처들어
가기로 안병찬 이세영 반창노등과 거사하기로 모의했다. 이때
광묵의 아들 규대는 아버지의 신병을 염려하여 출진을 만류하니
국난에 처해서 어디 앞일을 바라겠느냐는 호통에 규대 역시 아버
지와 덩달아 쾌히 의병에 가담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각 지방에서 몰려온 의병들을 정비해서 민종
식을 대장으로 하고 채광묵은 참모장이 되어 홍주성을 침공 점령
하게 되었으니 그 의기가 중천하여 죽음으로 성을 사수하기로 했
다.
이러한 전승을 전해들은 서울에 있는 왜군들이 포병 기마병 보
병 헌병등이 총동원 되어 홍주성을 침공해 오니 과부족인 의병으
로는 어쩔수가 없었다.
결국 홍주성은 왜군의 손으로 돌아가고 수 많은 의병이 전사하는
가 하면, 780여명이 체포되었고, 총 지휘자인 민종식도 피신했
고 의병들은 그들대로 대오가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채광묵 부자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최후의 일각까지 싸운
다는 굳은 결의로 솔선 지휘자가 되어 불길속을 뛰어들어 병사들
을 지휘했다. 하지만 모두가 수포로 돌아갔고 끝내는 그들 부자
는 장렬한 전사를 했다.
그들 부자가 순직을 하면서 세인들은 부사충하고 자사효라 하였
다. 그러니까 이버지는 죽어서 나라에 충성을 했고 아들은 죽어
서 부모에게 효도 했다는 것이다.
이 전투에서 붙잡혀 재판을 받은 의병들은 옥고를 치루거나 멀
리 유배를 당했다. 그리고 채광묵 부자의 시체는 찾을 길이 없어
서 평소에 입었던 의대로 초혼하여 청양군 사양면 신왕리 앞 숲
선영에 나란히 묘를 세웠다.
1977년 12월13일 원호처에서 내려준 추모묘비와 상석으로 묘석을
정리하여 주변을 정화하였고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되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