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풍장 ▶정산면 송학리의 풍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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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청양문화원 | 등록일 | 2003-02-27 | 조회 | 5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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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면 송학리의 풍장】 ▶명칭 엣부터 전통적인 이름으로는 "풍장친다"라고 하였다. 또는 "풍 장놀이 하자"라고 하였다. 풍물이라는 말은 잘 쓰지 않았다. 30 대 이하의 사람들은 농악이나 풍물이라는 말을 많이 쓰기 시작하 였다. ▶기 영기의 바탕은 홍색이었으면 글씨는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검정색으로 썼다. 건립이나 두레 등 풍장을 칠 때는 항상 영기 2 개가 맨 앞에 선다. 영기는 왕이라 하였다. 그렇게 때문에 여기 가 가장 앞에서고 그 뒤로는 농기가 뒤따랐다. ▶악기 편성 풍장은 주로 마을에서 크게 벌이는 동화제때 많이 쳤다. 동화 제때의 악기 편성을 살펴본다면 영기를 든 사람이 맨 앞에 섰 다. 그 뒤로 농기가 서게 된다. 귀 뒤로 악기들은 꽹과리. 징, 장구, 북 법고(소고) 순서대로 선다. 꽹과리는 상쇠가 가장 맨 앞에 서고 그 뒤로 부쇠 2명이 선다( 쇠잽이 3명) 부쇠 뒤로는 징잽이 3명이 따라 붙고 그 뒤로 상장구와 부장구 2명이 서며(장 구재이 3명(북잽이 3명)이 선다. 법고잽이는 맨 뒤에 9명이 따 라 붙는다. 악기잡이는 뒤로는 잡색이 섰는데 총을 들고 자루를 짊어지는 포 수와 등이 굽은 꼽사등(곱새) 중 등 이 따라 붙었다. 건립을 할 때는 법고잽이 뒤로 싼푸대를 진 쌀수금관이 선다 ▶악기와 보관 마을 창고에 보관을 하였는데 어린 아이들은 치고 싶어도 어 른들이 못 치게 할 정도로 아주 엄격히 관리를 하였다 ▶복장 풍잘을 칠 때는 머리에는 상투를 틀고 탕건을 썼다. 이마에 하 얀 머리띠를 두른다. 옷은 기본적으로 흰 저고리와 흰바지를 입 었다. 상쇠는 돌모(상모)를 착용하였고 상쇠를 비롯한 부쇠 2명 은 수실(부실)을 착용했다. 법고잽이(법고선수)중 한명은 12발 상모를 썼다. 농악대회를 나갈 때에는 나갈 때에는 법고잽이들 이 고깔을 썼다 ▶가락과 진법 3채를 치면서 시작한다. 이것은 쇠장단을 '갱갱 갱개개갱 갱 갱 갱개개갱"으로 친다 걸립을 할 집에 들어서면 마당 뒤바퀴를 3채를 치면서 돌다가 2채(쇠장단:갱갱)로 바꿔친다. 그렇게 3채와 2채가락을 반복하 여 치면서 마당서 부엌으로 들어가고 뒤곁도 한 바퀴 돈다. 3채와 2채를 친 뒤에는 굿거리 장단을 치고 그 다음에는 7 채를 친다. 이동할 대나 장거리를 갈 때는 걷기 편하도록 느린 장단인 질굿을 친다. 질굿은 쇠장단을 느리게 해서 "갱갱 갱갱 갱 갱 갱 뚝뚝 갱 갱 징- " 으로 친다 ▶치는 시기 정초에 건립을 할 때 많이 쳤다. 칠월 칠석날 두레 먹을 때 쳤 는데 논매기 할 때만 쳤고 모매기 할 때는 목방구만 북잽이 가 치면서 하였다. 논매기 두레는 10일-13일 정도 계속 되었는데 아시매기를 한 후 일주일 정도로 쉬고 두벌매기에 들어갔다. 두 벌을 맨 후 20일 정도에는 만물매기를 했다. 추석 설날과 같은 큰 명절에는 꼭 쳤다. 마을 어른들 육순잔치, 칠순잔치 때 쳤고 비가 안 올 때 기우제를 치르면서도 쳤다. ▶정초의 걸립 매년 정초에 건립을 하였다. 동화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건 립이었는데 일주일 동안 진행이 되었다. 농사를 짓느라 바쁜 시 기였기 때문에 풍물을 배우는 차원에서 기간을 길게 잡고 하였 다. 하루에 5-6집을 다니는데 한 집 당 약 30분에서 1시간이 소 요되었다. 마을의 집들은 모두 빼놓지 안고 다녔으며 각 집들은 저마다 쌀을 1말씩 받아놓고 쌀을 받은 사발에 촛불을 켜놓고 준 비하였다. 1년 내내 집안에 복이 많이 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건 립을 하였다. ▶두레풍장 두레는 김을 멜 대에 치라고 생긴 것이 풍장이다. 그만큼 두레 를 중심으로 풍물을 친다. 어렸을 때부터 두레 때 어른들이 치는 것을 보고 배운다. 마을 회관 앞에서 두레를 매러 가기 위해 오전 7시에 다 모여서 출발 한다. 마을회관 앞에 모두 모이면 한바탕 놀다가 질굿을 치면서 논까지 나간다. 논매기 두레는 있느데 모심기 두레는 없다. 논 을 맬 대 아시매기, 두벌매기, 만물매기 3번 모두 두레 풍장을 친다. 두레가 끝나고 마을로 돌아오면서도 악기를 쳤다. 두레 풍 장은 60년대까지 있었다. 그 후로는 사람들이 많이 빠져 나가고 운영이 잘 안되어 쇠퇴되었다. ▶무등타기 예사날에는 무등을 탔었는데 현대로 오다가 점점 없어졌다 1987년도에 마을에서 전국대회 준비를 계기로 다시 타기 시작했 다. 옛날에 풍장을 칠 때 무등과 함께 지게춤도 췄는데 지게를 짊어지고 지게 작대기로 장단을 맞추며 삥삥 돌다가 세마치 장단 에서 두마치 장단으로 가락이 바뀌면 큰 사람이 봉을 두른다. 가 운데에서는 지게 2개를 지고 다른 사람들은 그 주위를 삥 둘러 돈다. 이러한 지게춤, 지게걸음, 무등은 옛부터 전해져 오는 것 들로써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 <정산면 송학리 이덕종> 청양의 민속연희 ▶돌풍장 예전에는 악기를 아주 귀하게 여거서 함부로 건들지도 못하게 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주로 돌멩이로 장단을 치며 배우는 데 이 것을 돌풍장이라고 한다. 한편 나무꾼들이 지게르 지고 가면서 역활을 나누어서 지게작대기로 풍장을 치기는 것을 지게풍장이라 고 한다. 이것은 좀더 큰 성인들이 했다. 지금도 마을 창고에는 동화제 용품, 풍장기, 풍장 악기, 그릇 등 동네 물건들이 보관되 어 있다. ▶전승실태 현재 송학리의 상쇠인 이덕종은 마을 어르신인 고 최정준(송학 리 토박이)에게 가락을 이어받았다. 아이들이 15-16세 정도 자라 면 저통을 이으라고 악기를 내어준다. 그 전엔 악기를 만지지도 못히게 하였다. 깡통 뜯어진 것이나 세숫대야 깨진 것을 치면 서 장단을 익혔다. 제일 먼저 장구를 자았고 그 다으으로 2-3년 뒤쯤 쇠를 잡았다. (정산면 송학리 오영삼) 청양의 민속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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