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마을신앙▶노신제(거리제) ▶정산면 남천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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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청양문화원 | 등록일 | 2003-03-19 | 조회 | 9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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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면 남천리 노신제(거리제)】 ▶마을 개관 청양군 정산면 남천리는 인근의 공주시 우성면 봉현리와 연결 되어 있다. 따라서 행정구역상으로는 각각 청양군과 공주시이 지만 실제로 생활권은 같다. 곧 애경사와 같은 일이 있으면 두 마을 주민이 같이 참여하며, 주요 동네 행사도 같이 하 고 한다. 마을 위의 고개 쪽으로 남천리이고, 아래 쪽으로는 봉현리이다. 남천리는 새울, 짝바위, 새터울, 안묘동, 성주동, 탑골, 고양 골(고양동)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지역은 산촌의 형태는 몇 가 구씩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다. 새울은 조곡(鳥谷)이라고도 하며, 비록 소개위의 골짜기이지 만, 예전에는 30가구에 이으렀지만 현재는 20가구 정도에 불과 하다. 이 마을의 동화제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한편 새터울은 현재 남천리 마을회관 쪽의 마을을 말한다. 현 재 남천리는 약 60여호로 이루어져 있다. 봉현리는 제보자가 30대인 1960년대에는 114호였으나, 현재 약 80호도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줄었다. 위쪽에서부터 굴티, 갓모레기, 사룡동(四龍洞), 무재, 당골, 묘제로 이루어져 있 다. 갓모레기는 관수동(冠首洞)이라고도 하는데, 머리에 갓을 쓴 형상의 마을이란 뜻을 지닌다. 사룡동(四龍洞)은 산세가 4마리 의 용이 있는 형세를 지니고 있다. 실제로 아래에 큰 운을 타 고 난 집안이 잇다. 면암 최익현 선생이 출신지는 포천이지만 한일합방 이후에 이곳에 정착해서 현재 모덕사라는 사당이 있 다. 묘는 예산군 대흥리에 위치해 있으며 면암 선생의 고손인 최창규(현 성균관장)씨가 이곳 목면초등학교 출신이다. 묘제는 1,2반으로 나뉘며 현재 약 30호 정도이다. 일제시대에 는 이곳이 1, 2구로 나뉘었으며 개울 저쪽은 산연, 이곳은 수 연이라고 하였다. ▶소재지 ;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 남천리 ▶전 승 한때 인근 남천리 새울의 동화제가 중단되어 이곳에서도 중단 하려고 했으나 논란 끝에 계속하게 되었으며, 다행이 남천리 가 곧 복원되어 지금은 같이 전승하고 있다. 이곳 노신제가 먼 저 지네며, 이곳이 끝난 다음에 인근 남천리로 옮겨 동화제에 참여한다. 그래서 두 마을이 어울려 밤을 새우며 풍장을 치며 논다고 한다. ▶의 례 ▷제의 명칭 : 노신제(거리제) ▷시기와 장소 음력 정월 14일 저녁에 남천리의 이웃의 우성면 봉현리에서는 노신제를 지낸다. 제사는 저녁에 시작해 대략 오후 9시경에 끝 나며 시작 시간에 따라 약간 차이가 난다. 원래 이곳 노신제 는 정월 15일에 지냈으나 약 20~30년 전에 돌아가신 한 노인 이 다른 마을에서는 보름 행사가 모두 14일이라고 해서 날짜 를 15일에서 14일로 바꾸었다. 따라서 정산면 남천리의 동화제와 같은 거의 비슷한 시간대에 실시한다. 시간상으로 이곳 노신제가 약간 먼저 끝나며, 이 마 을 주민들은 이웃의 남천리의 동화제 장소로 이동하여 동화제 에 참여한다. ▷제관 선정 음력 1월 3일에 걸립하고 화주를 정하며, 화주 집에서 술을 담 근다. 걸립을 할때에는 정성을 들여야 한다고 생각해서 풀물 을 치며 집집마다 다니며 쌀과 돈을 걷는다. ▷제의 과정 우선 학교 앞에서 위쪽으로 길가에 홰를 설치한다. 제의는 풍 물을 앞세우고 우선 샘에서 ‘유왕제’를 지낸다. 거듭 확인했 으나 이곳에서는 용왕제가 아니고 유왕제라고 발음 하였다. 이 샘은 제보자의 집 앞에 있으며, 음력 1월 12~13일에 금줄 을 치고 깨끗하게 품어낸다. 현재는 폐샘이 되었으나 지금도 이곳에서 유왕제를 지낸다. 이어 홰에 불을 붙인 다음에 개울가의 느티나무(길 옆 가게 앞 에 위치했으나 고사함)가 있던 곳에서 거리제(노신제)를 지낸 다. 홰패는 20호에서 2개씩을 준비해서 모두 40개를 세운다. 각 가정에서 2개씩을 준비하는 이유는 집안의 대주가 부부를 합쳐서 2인이기 때문이다. 유왕제를 지내고 거리제 지내러 갈 때는 불을 붙인다. 일제히 불을 붙이면 학교 앞 큰 길이 꽃밭 과 같다고 한다. 제물로 쓰는 떡은 쌀 3되를 사용해 흰무를 한 다. 예전에는 무당을 불러 축원했다. 이때 복을 비는 대상은 2인 의 대주로 각각 권명대주, 곤명대주이며 이들은 각 집안의 세 대주와 그 부인을 일컫는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축문을 읽지 않는다. 그러나 근래에는 비용이 나가기 때문에 무당을 부르 지 않고 화주가 대신 축원을 한다. 마지막으로 소지를 올릴 때에는 화주부터 먼저 올린다. 그리 고 각 집의 호주(대주)들의 나이를 따져 나이 순서에 의해 차례로 소지를 올린다. -(정산면 남천리, 김원중)- 칠갑문화 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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