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정산면(定山面)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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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청양문화원 | 등록일 | 2002-04-24 | 조회 | 8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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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南(충남)의 埈嶺(준령) 七甲山(칠갑산)을 우로하고 산중계곡 과 산아래 펼쳐진 들에자리한 면이다. 百濟(백제)때는 悅己縣(열기현) 豆陵尹城(두릉윤성)이 있어 일찍 부터 한 고을로 발전한 곳이다. 泗比城(사비성)과 任存城(임존 성)사이에 위치한 豆陵尹城(두륜윤성)은 백제 멸망후 百濟復興軍 (백제부흥군)이 正武左平(정무좌평)을 앞세우고 끝까지 백제를 다시 세우기 위해 저항한 산성이기도 하다. 신라때는 悅城縣(열성현)에 속해서 가장 한가한 고을이였으며 다 만 백제의 큰 고을이였다. 高麗(고려)때는 定山縣(정산현)의 고을로서 다시 활기를 띠기 시 작했다. 行人(행인)이 많아짐에 따라 驛亭(역정)도 생기고 유인 들이 산세따라 정착하러 오는 수도 많았다. 이조때는 큰 고을로 발전되여 한때는 沙溪(사계) 金長生(김장생) 이 縣監(현감)으로 있었던 곳이며 이조말엽엔 閔宗植(민종식)이 天庄里(천장리)에서 義兵(의병)을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풍수 에 따르면 인물이 자리해서 돌출되는 곳이라 하는데 삼일독립운 동때는 어느곳 보다 의거가 빨랐고 오래 지속된 곳이다. 儒人(유 인)들이 많아서 학문의 고장으로도 통하는 곳으로 이조말엽엔 定 山郡(정산군)의 고을이라 邑內面(읍내면)이라 해서 校村(교촌)外 로 16개 洞里(동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大面 (대면)의 杜洞外(두동외) 17개 洞里(동리)와 仍面(잉면)의 瓦村 (와촌)외 24개리와 木洞面(목동면)의 五山里(오산리) 일부를 병 합하여 定山郡(정산군)의 이름을 따서 定山面(정산면)이라 하고 靑陽郡(청양군)에 편입되어 西亭里(서정리),驛村里(역촌리),白谷 里(백곡리),龍頭里(용두리),大朴里(대박리), 海南里(해남리),松 鶴里(송학리),南泉里(남천리),馬峙里(마치리),天庄里(천장리),瓦 村里(와촌리).內草里(내초리),新德里(신덕리),鶴岩里(학암리),德 城里(덕성리),光生里(광생리)를 관할하게 되였다. 지금도 옛 古 蹟(고적)이 많으며 많은 선비들의 逸話(일화)와 함께 얼이 잠겨 져 있는 곳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