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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면 상갑리 ▶원동 외5 게시판 상세보기

[청양문화원] - 지명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대치면 상갑리 ▶원동 외5
작성자 청양문화원 등록일 2002-05-23 조회 832
첨부  
 

百濟(백제)때는 古良夫里縣(고량부량현)에 속했고, 新羅(신라)때 

는 靑正縣(청정현)에 속해서 任城郡(임성군)의 地域(지역)이었으
며 高麗(고려)때는 靑陽縣(청양현)에 속했었다. 李朝(이조)때에
도 靑陽縣(청양현)에 속했으며 李朝末葉(이조말엽) 高宗(고종)
32年<1895>에 靑陽郡(청양군) 東下面(동하면) 地域(지역)인데 처
음은 <佳坡>(가파)라 부른 산수가 秀麗(수려)한 人心(인심) 좋
은 곳의 象徵(형징)적 마을이라 <佳坡>(가파)라 부르다가 壬 倭
亂(임 왜란)때 倭軍(왜군)을 몰아내기 위해 甲坡(갑파)라 써 붙
여 왜군이 물러가게 한 後(후)로는 <甲坡>(갑파)라 불렀는데
1914年 行政區域(행정구역) 改革(개혁)때 下甲里(하갑리) 만금
리 대마동 원동리 고정리를 병합하여 上甲里(상갑리)라하고 大峙
面(대치면)에 編入(편입)되었다.

▶院洞(원동)
<만전동> 東(동)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院洞>(원동)이
라고 부른다. 李朝 世祖(이조세조)때부터 仁議院(인의종)이란 院
(종)을 두고 京潮間(경조간)의 官物 運送(관물 운송)과 지나가
는 行人(행인)들 편리를 도모해주었다 한다. 仁議院(인의종)이
있는 마을이라 옛날부터 <院洞>(원동)이라고 불렀다.

▶甲坡(갑파)
上甲里(상갑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다. 地形(지형)이 몹시 가파
른 곳에 자리한 마을이다. 옛날에는 < 坡>(파)란 山水(산수)가
아름답고 人心(인심)이 좋은 卽(즉) 말해서 凶年<흉년>에도 나
무 흔하고 집집마다 굴뚝에서 연기가 나고 쌀밥 지어 먹은 道
(도)을 지적하는 마을인데 이 마을이 그렇게 유명한 마을로 京
鄕 名地(경향 명지)에 소문 났었다. 헌데 壬辰倭亂(임진왜란)
때 交通(교통)이 좋았던 이곳에 倭兵(왜군)의 侵入(침입)을 막
기 위해 마을入口(입구)에 甲坡(갑파)라고 마을 標示板(표시판)
을 세워 놓았는데 마침 倭兵(왜병)들이 이곳에 와서 마을에 侵
入(침입) 할려다가 標示板(표시판)을 보고 석경으로 길이 험하
고 洞名(동명)이 <甲坡>(갑파)라 不吉(불길)한 징조라고 그냥 물
러갔다 한다. 그래서 마을을 구했는데 그후부턴 이 마을이 避難
處(피난처) 로 알려졌었다. 甲坡(갑파)라 부르며 또한 <갑패>라
고도 부른다.
甲坡(갑파) 윗마을은 <上甲坡>(상갑파)라 부르고 갑패 아랫마을
은 <下甲坡>(하갑파)라고 부르는데 漢陽(한양)에서는 살기좋은
마을을 말할때 李朝(이조)때만 해도 <上甲內洞>(상갑내동)을 으
뜸으로 꼽았는데 <上甲內洞>(상갑내동)이란 <甲坡>(갑파) <上甲
坡>(상갑파) <下甲坡>(하갑파)를 통털어 지적하는 말이다.

▶高享子(고향자)
<甲坡>(갑파) 東(동)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高享子>
(고향자) <高享里>(고향리) 라고 부른다. 옛날에 高氏(고씨)라
는 사람이 이 마을에 정자를 지었는데 그래서 高氏(고씨)가 정자
를 지은 마을이라 <高享子>(고향자) <高享里>(고향리)라 부르는
마을이다.

▶大馬洞(대마동0
<원동> 옆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大馬洞>(대마동)이라 부
른다. 李朝 世祖(이조 세조)때부터 京潮間 交通(경조간 교통)의
큰 휴식처였던 여기에 仁議院(인의원)이 있었는데 仁議院(인의
원)에서 쉬어가는 官馬(관마)와 人馬(인마)가 쉬어갈때 이곳에
서 큰 말우리칸을 만들어 놓고 말에게 먹이도 주며 쉬어가게 한
곳이다. 그래서 <大馬洞> (대마동) <대마적>이라고 부른다.

▶萬全洞(마전동)
<下甲坡>(하갑파) 東(동)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萬全
洞>(만전동) 이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上甲內洞>(상갑내동) 갓
쪽에 자리해 있으면서도 안전하게 농사일을 짓는 마을이라해서 <
萬全洞>(만전동)이라 부른다. 李朝(이조)때 학자 李淸(이청)이
한때 숨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石門(석문)
上甲里(상갑리) 入口(입구)에 깎아 세운듯한 바위가 兩쪽으로 둘
러서 있는데 이곳을 <石門>(석문)이라 부른다. 溪谷(계곡) 사이
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石門(석문)을 지나면 넓은 들인데 그
들을 中央(중앙)으로 하고 마을이 點在(점재)되어 있는 것이다.
石門(석문)에는 지금으로 부터 約(약)200年前에 이곳에 살았다
는 담진 崔氏(최씨)의 선비 崔希夔(최희기)의 詩(시)가 새겨져
있는데 그가 自然(자연)과 山川(산천)과 鳥鳴(조명)에 감동되어
지은 詩라 傳(전)한다.

滿全洞 淸一翁 (만전동 청일옹)
- 水 年年碧 ( 수 년년벽)
山 火 萬古紅 (산 화 만고홍)
寄 興 後來 (기 흥 후래 )

耽津後人 崔希夔(탐진후인 최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