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목면(木面)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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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청양문화원 | 등록일 | 2002-08-09 | 조회 | 7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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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石器時代(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定着(정착)하기 시작한 것 으로 보이는 木面(목면) 一帶(일대)는 支石墓(지석묘) 또는 出土 (출토0되는 各種(각종) 기물로 보아 定着農耕社會(정착농경사회) 가 점차 形成(형성)되여 갈 때에 部落社會(부락사회)가 點在9점 재)되여 있었을 것으로 推定(추정)되는 地域(지역)이다. 칠갑산 아래 넓은 들에 자리한 목면은 馬韓(마한) 때엔 벌써 상당한 部 落(부락)이 있었다고 부는 것이다. 土質(토질)이 또한 비옥했었 고 山(산)과 河(하)와 들과 그리고 숲이 農耕社會(농경사회) 部 落(부락)을 形成(형성)하기엔 알맞은 地域(지역)이었던 것이다. 百濟(백제)때는 悅己縣(열기현0에 속해서 百濟(백제0가 북남쪽으 로 번영하는데 큰 몫을 차지하여 頭陵尹城(두능윤성) 같은 百濟 (백제)의 중요한 城(성)이 차지하게 하였고, 百濟 滅亡後(백제 멸망후)는 百濟(백제) 復興軍(부흥군)이 定着(정착)하기도 한 곳 이다. 그 후 新羅(신라) 高麗(고려) 때는 풍요로운 農耕(농경) 의 마을로 成長(성장)되었으며 이조에 들어서선 學問(학문)에 뜻 을 둔 선비들의 定着地(정착지)가 되기도 한다. 新羅(신라)때는 扶餘(부여)에 딸린 悅城縣(열성현)이였고 高麗(고려) 初(초)엔 定山縣(정산현)에 속하고 제8대 현종 9년엔 公州(공주)에 속하기 도 하고 李朝 太宗(이조 태종)3년(1403)엔 다시 定山縣(정산현) 에 속한다. 李朝襪葉(이조말엽) 高宗 32년엔 정산군에 속해 나무 가 무성한 곳이라 木洞面(목동면)이라 하여 千杜門外(천두문외) 30 個洞群(개동군)을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仍面 (잉면) 文城里(문성리) 玉峴里(옥현리)의 각 일부와 잉면의 백곡 리 일부 그리고 公州郡(공주군) 半灘面(반탄면)의 진두리와 城頭 面(성두면)의 盤谷里(반곡리) 건천리 평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 여 木面(목면)이라 해서 청양군에 속해서 華陽(화양) 新興(신 흥) 安心(안심) 松岩(송암) 本義(본의) 大平(대평) 池谷(지곡) 7 개리로 개편 관할하는 면이 되었다. 이조말엽의 政治家(정치가) 이며 學者(학자)인 勉庵(면암) 崔益鉉(최익현)의 飼堂(사당) 慕 德祠(모덕사)가 자리한 곳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