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청남면 인양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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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청양문화원 | 등록일 | 2003-05-15 | 조회 | 7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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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청양군청남면인양리(바다터,바라터,해대,인양)(리) 한촌 부락 "바르터"로도 불리우며 해대(海垈)와 같은 의미이다. 본래 정산군 장면의 지역으로서 백마강과 까치네 사이가 되므로 바다 터, 바라터또는 해대 라 하였으며, 조선조 제22대왕 정조 때 한 규, 한 기종 부자가효자로 이름이났으므로, 인량이라 하였다는 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따라 인양리라 하여 청양군 청장면 에 편입되었다가, 그후 면명 개정에따라 청남면 인양리가 되었 음. 구영-다리(다리):인양리에 있는다리, 근처에 귀양살이 왔었 다함. 옛날에는 ''되-섬''이 귀양살이 하던곳이었는데 이 다리가 되섬으로 가는 다리였음으로 귀양가는 달라하여 ''구양다리''로 불 렸는데 변하여 ''구영다리'' 가 되었다한다. 되-섬(승도)〈논〉:바 라터 앞에 있는논. 되처럼 생긴 작은섬이 있었음. 미영-개 〈내〉:바라터 앞으로 흐르는 내.물이맑음. 부처짓-골〈골〉인양 리서쪽에 있는 골짜기,돌부처가있었음. 부해-평(浮海坪)〈들〉: 바라터앞에있는들, 장마때는 금강물이밀려들어옴. 산-꽂이(삼화 동)〈마을〉:바라터옆에있는 작은마을, 산이 고지(곶-툭 삐져나 온 곳)을 이루었음. 원천-골(원청동)〈마을〉:인양리에 있는마 을,좋은샘이 있음. 한효자-묘(韓孝子墓)〈묘〉:되섬옆에있는 효 자 한기종의무덤. 손가락을 잘라 친병을 3일간 더 연명하였다 하 여, 암행어사 심환지 가 조정에보고 하여 조선 정조11년 임금의 명으로 마을명을 ''仁良''(인량)으로개칭할정도로 칭송이높음. 보 해교(석비리다리)〈다리〉:청남과부여를연결하는다리. 바라-터: 금강변에 위치해서''미영개'' 맞은편에 있는마을, 바다의 대지(垈 地)라는 의미로 해대(海垈)라고도 불린다. 한씨들이 대대로 많 이 사는 한촌(韓村)마을로 옛날 한 노승이 시주를 왔다가 한씨집 에서 시주를 후하게 주자 이 곳이 명당 이라고 알려주었다고 한 다. 이 곳의 지형이 바랑과같은''바랑터''이고 뒷산은''목탁''형상이 라하여 여기에 터를 잡으면 바랑을 짊어짐 격이므로 대대로 부자 가 될것이라 하여 처음에는''바랑대''라 했다. 지금까지 한씨들이 (叅議公 諱 전磌 派)후손들이 종손 한 상 대 를 비롯 한촌부락 을 형성해 150년간 부자로 살고 있다함. (韓 逵한 규)숙종 18년(1692)~영조24년(1748) 23세 청주인(淸州 人)으로 휘는 규(逵) 이고 자(字)는 도원(道源) 이다. 선조(宣 祖) 사부(師傅) 윤명(胤明)의 후손이며, 음사(蔭仕) 경(憬)의 현 손(玄孫)이요, 정랑공 린서(正郞公 璘瑞)의 아들이고 중추공 세 상(中樞公 世上)의손자 이며 참의공 (參議公)의 10대손이다. 어 머니는 의인 옥구 임씨(宜人沃溝林氏) 며 일신(日新)의 따님이 다. 공은1692년(숙종(肅宗18년)임신년(壬申年에) 출생하여, 성품 (性品)이 효성(孝誠)에 지극 하였다. 부병(父病)을 지성껏 돌보 고 창강수상(滄江水上:백마강 창강나루) 에 나가 잉어 를 구해다 가 바쳤고 병이 위독(危篤) 하자 단지주혈(斷指注血) 하였으나 효험없이 영조 24년 1월16일졸하였다. 영조 3년(1727) 숙계효행 (肅啓孝行) 하여 급복(給復) 50결(結) 하였다. 후손(後孫)이 인 양리(仁良里)에 거주 하고 있다. 배위 제주고씨(濟州高氏) 는 한 욱(漢)郁의 따님이고, 아들은 기주(箕冑),기종(箕宗) (系迪后), 이다. 공의 배위 제주고씨(濟州高氏)는 영조(英廟) 19년(1743) 에 졸하여 청남면 왕진리 (旺津里)좌랑산 하 (佐郞山 下)에 안장 (安葬) 하였는데 난세(亂世)로 실호(失護) 되었다. 묘:충청남도 청양군 청남면 천내리 백우동 임좌 세향일 음 10월 첫째 일요일 (韓箕宗한기종) ?~정조16년(1792) 24세 청주인(淸州人)으로 공 의 휘(諱)는 기종(箕宗)이고 자(字)는 창운(昌運) 이다. 생부(生 父)는 규(逵) 이며 통덕랑(通德郞) 적(迪)의 계자로 정랑공 린서 (璘瑞)의 손자 이며 참의공(參議公) 의 11대손이다. 어머니는 공 인 남포백씨(恭人藍浦白氏) 로 시은( 時殷)의 따님이다. 효자(孝 子)인 부친(父親) 의 엄한 교육(敎育)을 받아 어려서부터 효성 (孝誠)이 지극하여 향리(鄕里人) 들이 효자(孝子)라 칭하였다. 항상 법도 (法度)있음을 신조(信條)로 삼고 출필고반필면(出必告 反必面)을 실천 하였다. 부모(父母)의 병환(病患)중에는 침식을 잊고 세수도 아니한 채 시탕(侍湯)에 힘썻으며. 부친의 병환이 위독 해지자 대변(大便) 맛을 보아 병을 헤아리고 손가락을 잘 라 피를 주입(注入)하여 여명(餘命)을 연장 시켰다. 친상(親喪) 을 당하여는 3년간 상복(喪服)을 입고 여막(廬幕)에서 초상(初 喪)때 처럼 애통(哀痛) 하였다. 호서지방 암행어사(暗行御史)심 환지 가 공의 효행을듣고 조정(朝政)에 알리니 정조(正祖) 11년 (1787)공이 사는 마을을 인양리(仁良里)라 부르게 하였고 복호 (復戶:특정한 대상자에게 조세나 그밖의 국가적 부담을 면제 하 여주던일) 가 내렸다. 급복(給復) 50결(結) 하였으며 정조(正 祖) 16년 (1792) 12월24일 졸하였다. 배위 한산이씨(韓山李氏) 는 광유(匡유)의 따님이고 아들은 명상(命尙),교관 명원(敎官 命 元) 이다. 공의 배위 한산 이씨(韓山李氏) 는 정조(正祖)경술(庚 戌) 14년(1790) 7월20일 졸하니 충남 청양군 청남면 하원 원곡 해좌(仁良里下元泉谷亥坐) 에 안장(安葬) 되었다. 세향일 음 10 월 첫째 일요일 (정조대왕실록:정조 권23 11년 정미 4월8일 正 祖 券二十三 十日年丁未四月八日)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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