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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면 금정리(金井里) 게시판 상세보기

[청양문화원] - 지명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남양면 금정리(金井里)
작성자 청양문화원 등록일 2003-08-08 조회 984
첨부  
 

본래 청양군의 남하면의 지역으로 좋은 우물이 있었는데 근처에 

는 사금이 났으므로 또는 백제 31대 의자왕이 샘이 좋은 데가 있
어 이물을 길어다 먹었으므로 금정이라 하며 조선때 금정역이 있
었다. 금정역 또는 역말, 역촌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
합에 따란 연석리, 신역리, 구역리와 남상면의 하적리, 정탁리
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금정리라 해서 사양면에 편입됨.
1987년 1월 1일 면명 개칭으로 남양면 금정리로 되었음.
''역말''사람이라고 하면 기분이 안좋다 하여 金井으로 고침

▶구역<원역말>(舊驛)[마을]
역말 서쪽에 있는 마을. 전에 금정역이 있었음

▶금정-교(金井橋)[다리]
금정리에 있는 다리
1931년에 놓았다가 1980년 재개설 하였음

▶금정역(金井驛)터
남양면 금정리 역말은 고려때부터 금정역이란 역이 있었
던 곳이다 금정역은 고려때부터 충청도의 역으로 출발하여
이조초에는 팔개역을 관할하는 역이 되였다가 그후는 온양에
있었던 시흥역도까자 합쳐서 큰역이 되여 시흥역에 속한
육개역까지 합하여 15개까지 관할하는 큰역이 되는 것이다.
금정역엔 역의 운영상 역전이 수백두락 있었으며 금정역사에는
수십필의 말을 두고 또한 말을 키우는 목장이 있었다. 금정
역은 서해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큰길이였고 역 아래 속한 작은
역에서는 원을 두어 길이 험한 곳이나 어려운 고비길에서 행인
의 편리를 도모해주며 공무서와 관물, 관원에 운송에 이용하였
으며 역무를 담당하였었다. 금정역을 관할하는 벼슬은 찰방으
로서 종육품의 관직이였고 찰방 아래엔 이방, 호방, 병방, 형
방, 공방이 있었다. 금정역의 찰방을 금정역에 있었던게 아니
라 지금의 화성면 용당리 용곡역에 찰방부를 두고 있었으나
실지로 큰 역은 금정역이였던 것이다.
지금은 산골에 자리한 금정리에 큰역이 있었던 것은 그 당시
그만치 중요한 역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조중엽에 이르
러 반정인사들의 유배지가 또한 남도지방이나 도서에 국한되
였었다. 충청도에서도 남도지방의 유배지로서는 대청도, 원산
도였고 육지로서는 결성,비인등지였다. 조정과 직접 닿은 통
시기관으로서 그래서 반정인사들의 사찰이 있을때는 찰방이 맡
은 경우가 많았었다. 더구나 암행어사가 군사를 필요로 할때는
찰방이 거느리는 군졸과 역졸이 대거 출동하곤 하여 역은 조정
과 통하는 무서운 권력을 행사하는 기관으로 등장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조말엽 가까이 와서는 용전역이 차츰 비대해짐에
따라 용전역으로 역무가 차츰 옮겨지고 고종때 없어지게 된다.
충청동 서해 부근에 자리한 큰 역이 이곳에 있었고 지금은 그
당시의 터만 남았다.

▶한자머리
역말 북서쪽으로 한자머리 라는 놀이터가 있다. 지형이 머리처
럼 까치내에 임하였는데 수석의 경치가 아름답고 옥학루가 있
어서 더욱 아름답다. (일척두)라 부르기도 한다.

▶금정리에 용난모퉁이라고 부르는 모롱이가 있다. 바위 아래에
서 이무기가 백년 수도끝에 승천하였다 해서 용이 난 모롱이
라 (용난모퉁이)라고 부른다.

▶연석(硯石)
역말 아래쪽에 자리한 마을을 연석또는 아랫말이라고 부른다.
마을에 벼랑이 있고 옛날에는 단게석이 나온 마을이라 (연석)
(아랫말)이라고 부른다.

▶신역(新驛)
구역 북쪽에 자리한 마을이 (신역)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이조때 금정역이 이(구역)에 있다가 편리상 이 곳에 옮겨왔다
해서 (新驛)이라고 부른다.

▶띠지산
역말과 금정교사이에 산이 있는데 이 산을 (띠지산)이라고
부른다. 옛날의 고분이 있는 산이다.

▶돌안산
금정리에 있는 산이다. 산세가 금정리를 향하여 돌아 앉았다

해서 (돌안산)이라고 부른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