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남양면 신왕리(新旺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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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청양문화원 | 등록일 | 2004-05-18 | 조회 | 6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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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때는 고량부리현에 속했고, 신라때는 청정현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청양현에 속했었다. 이조초엽엔 청양현에 속했다가 이조말엽엔 청양군 남하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에 따라 수주리 압수동 신촌리 족한리 추목동 일부와 홍주군 상전면의 평구리 일부를 병합하여 신촌과 평구리의 이름을 따서 신왕리라 하여 사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87년 1월 1일 면명 변경에 따라 남양면으로 개명되므로 남양면 신왕리가 되었다. ▶지장사(화장사)터 신왕사에 절터가 있는데 이 절터가 (知藏寺)절터다. 지장 사의 내력은 미상이나 조선중엽에 화재로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절터 부근엔 흑회색 청기와 조각들이 산재돼 있다. 극락전에 봉안했던 [아미타불좌상][관세 음보살좌상][대세지장보살좌상]등 목조삼존상은 장곡 사로 이전됐다가 용암사 극락전에 봉안되었다. ▶族閑(족한) [왕림]서쪽 골짜기에 자리한 마을을 [족한]이라고 부 른다. 백제말의 충신[아솔]이 백제가 망하자 신라의 부 름에 응하지 않고 불사이군의 지조를 지키며 이곳에 자리 하고 여생을 보냈다 한다. 한 맥의 줄기를 굳건히 지키며 살은 충신의 마을이라 [족한]이라고 부른다 한다. ▶靑龍藏(청용장) [수단]왼쪽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이 [청용]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숲이 우거진 이곳에서 용이 승천하였다 하여 [靑龍]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華藏사(화장사) [화장굴]로 부르는 골짜기에 절이 있는데 이 절을 화장사 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미상이나 화장사가 있었다는 터에 1959년에 디시 세운 절이다. ▶李希良 墓(이희량 묘) 신왕리에 도정 이희량의 묘가 있다. 이희량은 완산인으로서 성종의 남무산군조의 현손이다. 오성군에 봉하고 벼슬은 도정 에 이르렀었다. 연종때는 양패전사를 내리였었다. 처음 청양읍 벽천리로 퇴거하고 벽함정을 세웠으며 여기에서 풍유를 즐기며 강송으로 세월을 보냈다. ▶旺林(왕림) (靑龍) 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旺林)이라고 부른 다. 마을에 끝 숲이 있어서 (旺林)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오얏말 (궁평)서쪽에 자리한 마을을 (오얏말)이라고 부른다. 마을에 (오얏나무)가 있다해서 (오얏말)이라고 부르며 (李村)이라고 도 부르는 마을이다. ▶鴨水(압수) (수단)서쪽 골짜기에 자리한 마을을(압수)라고 부른다. 마을 앞서 沼(소)가 있어서 물이 맑고 오리가 날아와서 놀던 곳인 데 그 맑은(沼)와 오리와 연유해서 압수라고 부른다 한다. ▶水丹(수단) (궁평)북쪽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수단이라고 부른다. 마을뒤에 큰 숲이 있고 그 숲아래 마을이 있는 마을이다. ▶상투바위 족한 남쪽 백월산 꼭대기에 마을이 있는데 이 바위를 상투 바위라고 부른다. 산덩에 상투와 비슷한 바위가 있어서 상투 바위라 부르는 바위다. ▶노적산 청용 마을 앞에 자리한 산을 (노적산)이라고 부른다. 산 모 양이 노적가리처럼 생긴 산이라(노적산)이라 부른는데 이 산 에 노루 산토끼가 많았던 산이다. ▶蔡光默 墓(채광묵 묘) 신왕리에 독립투사 채광묵의 묘가 있다. 채광묵은 평광인으로 서 자는 명숙이며 호는 귀연이다. 그는 철종원년에 홍주매평리 태어났으며 자라서 시를 잘하여 당세에 이름났으며 일명 초남 선생으로 불렸었다. 그래서 많은 시인묵객이 찾아 들었고 인생 을 소용하면서 나라안의 걱정에 항시 음식을 잃을 정도였다. 선천적으로 애국적인 긍지를 타고난 그는 고종 32년 을미에 위 인이 국모살해사건이 일어나자 통분을 금치 못하고 조정에서 관직에 오른 자들을 통박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애국지사 채광묵은 아들 채규대와 함께 적진으로 뛰어들어 분 전분전 하다가 병사의 총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그와 그 아들이 죽자 인근의 유림서민 모두가 애석해 했고 눈 물을 흘리지 않는 자 없었다. 또한 그의 몸을 수거치 못하고 평소에 입었던 의대로 초귀하여 신왕리 선영지에 장하였으며 그 아들도 여기에 묻이니 『父死忠하고 子死孝라』 하여 애석해 했었다. 홍주성의 지사 채광묵의 묘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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