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메뉴 닫기
서브페이지 배경
화성면 용당리(龍堂里) 게시판 상세보기

[청양문화원] - 지명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Title 화성면 용당리(龍堂里)
Name 청양문화원 Registration Date 2004-10-12 Hits 798
att.  
 

백제때는 사시양현에 속했고, 신라때는 신양현에 속했으며 고려 

때는 여양현에 속했었다. 이조때는 홍주군에 속해서 이조말엽엔
홍주군 화성면의 지역안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에 따라 모촌리
원당리 당초 옥계리 룡곡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룡곡과 원당의
이름을 따서 룡당리라 하여 청양군 화성면 룡당리에 편입되었다.

띠실
<용곡> 남동쪽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띠실>이라고 부른
다. 마을에 띠가 많이 있는 마을이라 <띠실> <저산>이라고 부른


대구서씨 열녀문
열녀 대구서씨의 열녀문이 화성면 용당리에있다. 서씨는 이조
철종때의 영의정으로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조두순의 아내로서
조정승이 정계에서 은퇴하여 기로소에 들어가자 그 남편의 시종
을 드는데 여념이 없었다. 일생동안 정계에서 그 복잡 다단한 정
사에 임하여 항시 피로한 나날을 보내는 남편시중에 일생동안
온 정신을 바쳤으면 남편이 이세상에 살아 있으므로 자기의 목숨
도 이 세상에 자리하게 되였다고 생각 했었다. 그래서 그녀가 항
상 근심하는 것은 남편이 때때로 피로에 지쳐 누워 있다던가 병
석에 눕는 일이였다. 그래서 열씨는 남편을 일생 동안 모시는 동
안 남편의 취미와 건강을 샅샅이 알게 되어 남편이 몸살이 났을
때는 어떠한 방법으로 치료하면 되고 남편이 감기에 들었을 때
는 어떠한 방법으로 치료하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정승은 정사때 몸이 괴로우면 집에와서 어디가 불편하다고 하
면 아내 서씨가 알아서 치료를 해주는 그런 아내였다 한다. 그래
서 조정에서는 여러 대감들이 서씨는 한의라고 소문이 날 만큼
널리 알려졌었다. 기로소에 들어간 남편의 뒤치닥 거리에 온 정
신을 바치는 서씨는 늙은 자기 몸보다 남편의 몸에 더욱 신경을
써서 항시 남편의 얼굴을 보고선 여러가지 약을 때때로 선택해
서 주곤하여 남편은 건강을 유지했었다. 그런 세월이 얼마 흐르
다가 남편은 노환으로 죽게 되였다. 남편 조정승이 죽자 그녀는
자기의 정성이 부족해서 자기보다 일찍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래
서 대성통곡 하다가 남편의 죽으면 자기의 목숨도 필요없다는 것
이니 죽어야 겠다고 생각하고 자기 앞에 자녀들을 모아놓고 말하
기를 이제는 너희들도 자라서 스스로 갈길을 선택할 수 있게 되
였고 스스로 세상사에 임하라고 말하고선 목숨을 끊으니 서씨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고종 임금은 한국의 아내로서 또는 어머니로
서 귀감이되는 서씨에게 정문을 나리면 경기도 양주에 있던 묘
도 명당이 있는 자리에 옮기라하여 지금의 청양군 화성면 용당리
에 옮기게 되고 이곳에 열녀 서씨의 열녀문을 세우게 하였다.

용곡
<띠실> 북서쪽으로 자리한 마을을 용곡이라고 부른다. 이조 금
도 찰방에 딸린 용곡면이 있었던 마을이다.

용곡장터
<용곡> 아랫 마을을 <아래뜸>에 <용곡장터>가 있었다. 지금은 장
터가 없어지고 일부는 마을이 되고 일부는 밭이 되였다.

용머리
<용곡> 남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용머리>라고 부른
다. 마을 지형이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 해서 <용머리>라고 부른
다. 고려때 화성부곡이 있었으며 신당이 있었던 마을이다.

찰방집터
<용곡>에 이조때 살던 철방집터가 있다. 용곡역이 있을때 철방
이 살던 집이 여기에 있었는데 지금은 집터만 남아서 <찰방집터>
라고 부른다.

화성
<용머리> 앞산에 있는 토성을 화성이라고 부른다. 고려때 용곡부
곡이 있었고 이조때 용곡역이 있었다.

조두순묘
<용곡>에 고종때의 영의정 조두순의 묘가 있다. 조두순은 자는
원칠이고 호은 심안이며 시호는 문헌이고 본관은 양주다.
순조 26년(1826)에 관상정시에 장원급제하고 이해에 또 증광문과
에 병과로 또 급제한 수재로 다음해 규장각대교를 거쳐 1830년
사서 승지를 지내고 1834년에 대사성에 승진 다음해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는 청나라에서 변해가는 시국과 발달하는
세상물정을 곳곳이 관찰하고 귀국하였으나 그것을 정치에 반시시
키지 못했다. 전형적인 관사로서 보수성이 농후한 그는 그후 이
조참판황해도관찰사를 거쳐 1841년에 공조판서에 승진이어 형조
판서 한성판윤을 지냈다.1849년 철종이 즉위하자 예문관 대제학
으로 실록청군청당상이 되어 현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고 1851년
에 <동문휘고> 찬진당상을 지냈다. 이조판서 지중추부사를 지내
고 1853년에 우의정에 승진 1858년엔 좌의정에 올랐으며 1862년
상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에 대한 가혹한 착취가 계속되어 각처에
서 민란이 일어났다. 정치적 반란이 외세에 의한 침입으로 갈피
를 못 잡게 되는 처음 이였는데 지방에 내려갈수록 관의들이 백
성을 괴롭히는 가장 가혹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굶어 죽느
니 개혁을 외친 민란이 차츰 고조되여 갔는데 이때 부터 동학의
물결에 편승하는 백성들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더구나 민심이 깨
우쳐 지면서 서민들이 부르짖는 개혁과 서원간의 파벌로 오는 싸
움부터가 차츰 극도화할때 조정에서는 이를 다스리기 위해이정솔
을 설치케하고 그 총제관으로 섬종의 개혁에 힘썼었다. 고종 2년
(1865)에 영의정에 올라 삼군부를 부활 시키고 「대전회통」을
편찬할때 총제관으로 이를 간행했으며 대원군이 집정할때는 천주
교 탄압에 앞장선 장본인이기도 하다. 1866년 기로소에 들어가

고 1869년 봉조하가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