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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봉면 중묵리<中墨里> 게시판 상세보기

[청양문화원] - 지명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비봉면 중묵리<中墨里>
작성자 청양문화원 등록일 2004-11-01 조회 915
첨부  
 

백제때는 고량부리현에 속했고, 신라때는 청정현에 속했으며 고 

려때는 여양현에 속했었다. 이조때는 청양현에 속해서 이조말엽
청양군 서하면의 지역인데 <먹방>이와 중아 지역이 됨으로 <중덕
방이> 또는 <중묵방>이여 <중묵>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외덕리 내덕리 중묵리 상묵리 하묵리 신촌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중묵리라 해서 비봉면에 편입되었다.

덕다리
<먹방아>북동쪽 골짜기에 마을이 있는데 이마을이 <덕다리>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비봉산 아래에 자리한 마을인데 심양국씨와 공
산이씨가 많이 점주하고 있는 마을이다. 고려말엽 풍수에 밝은
도평대사가 이곳에 다시 지세를 본즉 한나라의 왕도인 고을에서
도 덕이 많은 사람이 사는 곳과 지형이 비슷하다 하며 그날 밤
이곳 마을사람들과 하룻밤을 새웠는데 그가 말하는 것도 덕이 많
은 사람같고 그가 지적한 대로 마을도 덕인이 살곳이라 하니 덕
다리라 부르기로 해서 지금까지 그리 불러오는 마을이라 한다. <
덕다리> <덕교>라고도 부르고 <덕다리> 바깥쪽 마을을 <바깥덕다
리>라 부른다.

텃골
<먹방이> 북쪽으로 비봉산 아래에 자리한 골짜기를 <텃골>이라
고 부른다. 옛날 먹방의 터가 있는 골짜기다.

자황산
중흑리 <비봉산>과 마주보고 있는산을 <자황산>이라고 부른다.
풍수설에 따르면 비봉산은 숫컷이고 자황산은 암컷이라고 하는
데 <숫컷>과 <암컷>이 교우되는 맥줄기엔 화가 없어서 한 면을
차지하고 들을 지키는 산이다.

알봉
중흑리에 있는 산인데 산 모양이 알처럼 생겼다 한다. 비봉산의
봉이 알을 품을 형상이라 하여 명당지가 있다해서 풍수객들이 명
당을 찾기위해 많이 드나드는 산이다.

쇠랑들
<상묵> 앞에 들이 있는데 이 들을 <쇠랑들>이라고 부른다. 들에
약 500평의 전답이 있는데 처음 수렁이었던 곳을 개간해서 전답
을 만들었따 하여 <수렁들>이라고 불렀는데 변해서 <쇠렁들>이
라 부른다.

불뭇골
<바깥덕다리>아래에 있는 골짜기를 <불뭇걸>이라고 부른다. 옛날
에 불무간이 있는 골짜기라 <불뭇골>이라 부른다.

먹방이
<텃골> 남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먹방이>라고 부른
다. 중묵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인데 옛날에 먹을 만드는 집이 있
었다 해서 <먹방이>라고 부른다. <묵방리>라고도 부른다. <먹방
이>위쪽에 자리한 마을은 <상묵>이라 부르고 <먹방이>아래쪽에
자리한 마을은 <하묵>이라고 부른다.

심양국씨 명당자리
참 기이한 일이였다. 심양국씨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살은지도 수
새가 되는데 대대로 한사람씩 불구가 되여 고생하는 사람이 이어
지는 것이었다. 눈병이 있어서 그리되는 수도 있고 처음부터 눈
한쪽이 불구가 되어 지형에 태어나는 수도 있었다. 그래서 마을
국씨들은 좋지안은 일로 푸리하고 그런일이 없어지도록 문중에
서 걱정들을 하는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이런 전설이 있
다.
고려말엽에 풍수에 밝은 도선대사가 전국의 명당지를 두루 살피
고 돌아다니다가 마침 이마을을 들리게 되였다. 도선대사가 <덕
다리> 마을에 와서 사방을 둘러봐도 나무랄데가 없는 좋은 지형
이였다. 그는 마을에 들려 이산 저산을 살피고 돌아다니 면서 놀
랜 나머지 계곡에 있는 바위에 덥석 앉고는 「덕이 많구만 은덕
이 쌓아질 지형이다. 어쩌면 한 나라 왕도의 <덕골>과 이처럼 같
을수가 있나!」
하고 경탄 하면서 바위에서 다리를 쭉 뻗는 것이였다. 마치 팔도
강산을 모두 누비고 돌아다니다가 이제야 묻힐곳을 찾았다는 환
희의 기쁨에 북바친 것 같은 태도였다. 그는 언뜻 이 마을을 떠
나가기 싫었던지 마을로 들어간다. 마을에서는 큰 기침 소리 하
나 들리지 않는 조심성 있는 사람만 모여사는 마을 같았다. 「하
기야 그럴수 밖에」하고 또 마을을 끼웃끼웃 한다. 어느덧 해는
기울어서 달이 뜨고 있었다. 그리고 하룻저녁을 쉴 잠자리를 청
하기 위해 한집 대문앞에 서더니 안을 기웃거린다. 그리고선 하
룻저녁 유해갈 것을 간청하니 주인의 쾌히 승낙하기에 안으로 들
어갔고 주인집에서 차려주는 밥상을 주인과 겸상을 해서 밥을 먹
는다. 그는 밥을 먹으면서도 아무 소리 없이 수저를 움직이는 주
인집 노인장에게 넌즈시 말을 걸었다.
「산수가 맑아서 덕이 많이 돌아오겠소이다.」
그리고선 대답을 기다리듯 주인장을 쳐다보았다. 주인인 노인은
몇번 젓가락을 움직이더니 하는 말이
「덕이야 사람이 쌓는 것이지 산수가 쌓아 주겠소이까! 산수가
좋아서 신선노름하기 마련이지요.」
하고 대답한다. 도선대사는 침착한 노인의 말에 더 이상 말을 못
하고 밥상을 물렸다. 저녁 밥상이 물러가자 노인은 대사가 곁에
자리한것도 모르는체 짚신을 삼기 시작한다. 솜씨가 고음 그 노
인은 참으로 짚신을 곱게도 만드는 것이었다. 곱게 만들은 옆에
좀 거칠게 만든 짚신도 있었다. 그래서 도사는 저것은 얼마냐고
물은 즉 곱것 말끔이 만들은 짚신은 값이 싸고 거칠게 만든 짚신
이 오히려 값이 비싸므로 어째서 그렇게 가격을 부르냐고 물어봤
다. 그러자 그 노인은 태연하게 말하기를
「거칠게 만들은 짚신은 짚이 거칠으나 이 보다 좋은 짚신이요.
우선 재료가 좋아서 질길 것이고 물건을 쓸수록 윤기가 날것이
며 이쪽 곱게 삼은 짚신은 보기는 좋으나 이번 구해온 재료가 픽
픽하오. 그래서 쉬 상할 것이요.」
빙그레 웃는다. 참으로 양심적인 대답이었다. 그래서 도선대사
는 하룻저녁 묵어가는 보답으로 묘자리를 하나 골라주고 마을을
떠나갔다. 그후 해를 여러해 넘기다가 짚신을 삼던 노인이 죽었
다. 그래서 그 노인의 유언도 있도 해서 묘를 만드느라고 도선대
사가 잡아준 자리에 쓰기로 하고 묘를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 묘
를 만드느라고 흙을 파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었다. 헌데
묘를 팔수록 땅속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흙을 파다보니 빨간 황토흙이 나왔다. 그래서 황토흙을 파다보
니 이번에는 그 아래로 잔잔한 자갈이 나오기 시작했다. 자갈에
는 수분이 하나고 없었다. 자갈 아래에서는 물이 흐르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래서 흙을 파던 사람이 자갈아래에 정말 물이
흐르는가 해서 꼭꽹이로 크게 한번 찍자 물이 분수처럼 솟구치
는 것이었다. 자갈 아래로 찍지를 말고 그 자갈위를 묘를 썼다
면 천하의 명당인데 그것을 모르고 아래로 찍어간 것이다. 그래
서 명단자리를 허무하게 버려졌다 한다.
묘를 잘못 썼는지 그후부터는 집안에대를 이어서 눈이 불구인 사
람이 꼭 꼭 한사람씩 나오는 것이었다. 국씨문중에서는 그래서
묘를 잘못쓴 탓이라고 그쪽으로 핑계를 대는데 <덕다리>에는 덕
이 많은 사람은 나와도 묘때문에 불구자가 하나씩 생긴다고 걱정

을 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