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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행정조직의 개편과 예산 게시판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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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선 초기 행정조직의 개편과 예산
작성자 예산문화원 등록일 2004-07-07 조회 585
첨부  
 

예산군의 개편 


예산군은 예산현·덕산현·대흥현 세곳을 합쳐서 이뤄진 고장이 
다. 예산군을 이해하기 위해선 바로 이들 세 현(縣)에 대한 이해 
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들 세 곳의 지역에 관한 기록으로 조선 
왕조의 처음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의 내용 
이다. 이를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예산현 

본래 예산현은 백제의 오산현(烏山縣)인데, 신라에서 고산현(孤 
山縣)으로 고쳐 임성군(任城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고, 고려 
태조 2년(1393) 기묘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 9년 
(1018)에 천안부(天安府) 임내에 붙이었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에서도 그대로 따르다가 태종 13년(1413) 계사에 예 
(例)에 의하여 현감으로 고쳤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온수(溫水)에 이르기 20리, 서쪽으로 덕산 
(德山)에 이르기 20리, 남쪽으로 대흥(大興)에 이르기 10리, 북 
쪽으로 신창(新昌)에 이르기 20리이다. 호수가 3백 21호요, 인 
구가 1천 4백 77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18명이요, 진군(鎭軍) 
이 27명이요, 선군이 1백 56명이다. 
토성(土姓)이 4이니, 심(沈)·장(張)·신(申)·손(孫)이요, 없어 
진 화물장(化物莊)·문석소(文石所)의 성이 1이니, 방(方)이요, 
문석소(文石所)의 속성(續姓)이 1이니, 심(沈)이다.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며, 간전(墾田)이 3천 7백 32 
결이요, 논이 7분의 3이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조·팥·참깨이 
다. 토공(土貢)은 종이·자리·칠·잡깃[雜羽]·족제비털·여우 
가죽·삵괭이가죽·말린 잉어·조피나무열매[川椒]·감·대추 
요, 약재(藥材)는 산골[自然銅]·인삼이다. 자기소(磁器所)가 1 
이요, 현의 동쪽 초이방(草伊方)에 있는데, 하품(下品)이다. 도 
기소(陶器所)가 1이다. 현의 북쪽 동화이(冬火伊)에 있는데 하품 
(下品)이다. 
무한산 석성(無限山石城)은 현의 서쪽 7리에 있다. 둘레가 4백 
28보이며, 지세가 험하고 안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겨울이나 여 
름에도 마르지 아니하며 또 군창(軍倉)이 있다. 서압대천(西壓大 
川)에 늘 독사(毒蛇)가 있어서 물이 넘칠 때를 만나면 그 해가 
있다. 역(驛)이 1이니, 일흥(日興)이다. 배다리 방죽[船梯堤] 현 
내(縣內)에 있는데 길이 4백 50척이며 논 1백 10결에 물을 댄다. 
월경처(越境處)는 공주(公州) 임내인 신풍(新豊)의 서촌(西村)· 
유동(柳洞)이 현의 동촌(東村)에 넘어와 있고 천안(天安) 임내 
인 신종 부곡(新宗部曲)이 현의 북촌(北村)에 넘어와 있다. 

2) 덕산현 

이산현(伊山縣)은 본래 백제의 마시산군(馬尸山郡)인데 신라에 
서 이산군(伊山郡)으로 고쳤고 고려 현종 9년(1668)에 운주(運 
州) 임내에 붙이었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덕풍현은 본 
래 백제의 금물현(今勿縣)인데 신라에서 금무(今武)로 고쳐 이산 
군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 현종 9년(1018)에 운주 임내에 
붙이었다가 명종(明宗) 5년(1175)에 비로소 감무를 두었다. 본 
조 태종(太宗) 5년(1405)에 이산(伊山)이 내상(內廂)의 성밑[城 
底]에 있기 때문에 인물(人物)이 조잔(凋殘)하였다 하여 곧 2현 
을 합쳐 덕산(德山)이라 하고 13년(1413)에 예(例)에 의하여 현 
감(縣監)으로 고쳤다. 딸린 소(所)가 2이니 내박(乃朴)·신곡(薪 
谷)이다. 
가야갑(伽倻岬)은 신라에서 사진(四鎭)을 정하고 이를 서진(西 
鎭)이라 하여 중사(中祀)에 실었다. 본조(本朝)에서 봄·가을에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한다. 사방 경계는 동 
쪽으로 예산(禮山)에 이르기 15리, 서쪽으로 해미(海美)에 이르 
기 15리, 남쪽으로 홍주(洪州)에 이르기 10리, 북쪽으로 면천(沔 
川)에 이르기 20리이다. 
호수(戶數)가 6백 49호요, 인구(人口)가 3천 2백 14명이다. 군정 
(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20명이요, 진군(鎭軍)이 2백 30명이 
요, 선군(船軍)이 87명이다. 
덕풍(德豊)의 성이 4이니, 황(黃)·송(宋)·이(李)·윤(尹)이 
요, 이산(伊山)의 성이 4이니, 고(高)·오(吳)·문(文)·송(宋) 
이다.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며 간전(墾田)이 5천 1백 99결 
이요, 논이 9분의 5이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조·참깨·팥이 
다. 토공은 지초·대추·감·여우가죽·삵괭이가죽·노루가죽· 
사슴가죽·밀[黃蠟]·칠(漆)·자리[蓆]이다. 도기소(陶器所)가 1 
이다. 현의 서쪽 풍지동(楓枝洞)에 있는데, 하품(下品)이다. 
읍 석성(邑石城) 둘레가 3백 98보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한다. 온천(溫泉)은 현의 남쪽 3 
리에 있는데, 집 1간이 있다.역(驛)이 1이니 급천(汲泉)이다. 
월경처(越境處)는 합덕(合德)의 서촌(西村)이 현(縣)의 북촌(北 
村)에 넘어와 있다. 

3) 대흥현 

대흥현은 본래 백제의 임존성(任存城)인데 신라에서 임성군(任城 
郡)으로 고쳤고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어 고려 현종(顯宗) 9년 
(1018)에 운주(運州) 임내에 붙이었다가 명종(明宗) 2년(1172) 
임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에서도 그대로 따랐는 
데 태종(太宗) 13년(1413)에 예(例)에 의하여 현감으로 고쳤다. 
딸린 소(所)가 1이니, 거변(居邊)이다. 예전에는 거물금소[居叱 
勿金所]라 하였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공주(公州)에 이르기 22리, 서쪽으로 홍주 
(洪州)에 이르기 6리, 남쪽으로 청양(靑陽)에 이르기 15리, 북쪽 
으로 예산(禮山)에 이르기 15리이다. 호수가 3백 88호요, 인구 
가 1천 5백 18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11명이요, 진군(鎭軍)이 
89명이요, 선군이 1백 명이다. 토성(土姓)이 3이니, 이(李)·한 
(韓)·백(白)이요, 망성(亡姓)이 2이니, 장(張)·오(吳)요, 거변 
(居邊)의 속성(續姓)이 2이니, 홍(洪)·이(李)이다. 자손이 있는 
데, 향역(鄕役)에 종사한다. 
땅이 기름진 것이 적고 메마른 것이 많다. 간전(墾田)이 3천 26 
결이요, 논이 3분의 1이다. 토의(土宜)는 기장·피·콩·팥·보 
리·배·닥나무이다. 토공은 대추·종이·잡깃[雜羽]·자리·여 
우가죽·삵괭이가죽·족제비털[黃毛]이요, 약재(藥材)는 북나무 
진[安息香]·산골[自然銅]·조피나무열매[川椒]·인삼·속서근풀 
[黃芩]이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요, 현의 동쪽 부은이리(夫隱 
伊里)에 있는데 하품(下品)이다. 도기소(陶器所)가 1이다. 현의 
동쪽 거변리(居邊里)에 있는데 하품이다. 
읍 석성(邑石城) 둘레가 2백 44보인데, 안에 우물이나 샘이 없 
다. 역(驛)이 1이니, 광세(光世)라 불렀다. 그러나 세속에서 잘 
못 알고 광시(光時)라고도 불렀다. 당나라 소정방(蘇定方) 사당 
(祠堂)이 대잠도(大岑島)에 있다. 고려 때에는 봄·가을로 사신 
(使臣)을 보내어 향축(香祝)을 내려 제사를 지냈는데 지금은 다 

만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