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메뉴 닫기
서브페이지 배경
조선전기의 사회경제와 예산-2 게시판 상세보기

[예산문화원] - 역사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조선전기의 사회경제와 예산-2
작성자 예산문화원 등록일 2004-07-07 조회 734
첨부  
 

나. 예산지방의 토성 


1) 예산현 

예산지역의 토착 성씨에 관한 기록으로 처음 보이는 것은 『세종 
실록지리지』이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예산은 토성(土 
姓)이 4이니, 심(沈)·장(張)·신(申)·손(孫)이요, 없어진 화물 
장(化物莊)·문석소(文石所)의 성이 1이니, 방(方)이요, 문석소 
(文石所)의 속성(續姓)이 1이니, 심(沈)이다. 
이들 중 성씨의 명맥이 파악되는 성씨는 예산 장씨가 있다. 예 
산 장씨는 고려조에 예산군(禮山君)에 봉해진 장영위(張英暐)를 
시조로 하고 있는데, 장영위 아버지로 예산군(禮山君)에 봉해진 
장유(張裕)를 시조로 전하는 문헌도 있다. 이 성씨의 사람 중에 
대표적인 인물로 장계선(張繼先)이 있다. 그는 선조 36년(1603) 
에 무과에 급제하고 광해군 1년(1609)에 부장(部將)에 올랐는 
데, 병으로 고향 목천(木川)에 낙향하여 전원생활을 하던 중 무 
용(武勇)을 인정받아 다시 기용되는데, 광해군 때에 도원수 강홍 
립의 휘하 장군으로 건주위의 야인을 정벌할 때 노성 남방의 부 
고싸움에서 전사했다. 효종 때에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2) 덕산현 

덕산지역의 토착 성씨에 관한 기록으로 처음 보이는 것도 『세종 
실록지리지』이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덕산지역의 덕 
풍(德豊)의 성이 4이니, 황(黃)·송(宋)·이(李)·윤(尹)이요, 
이산(伊山)의 성이 4이니, 고(高)·오(吳)·문(文)·송(宋)이다. 
이들중 성씨의 명맥이 파악되는 성씨는 덕산 이씨와 덕산 황씨 
가 있다. 덕산 이씨는 덕산호장 이존술(李存述)을 시조로 하는 
데 그는 고려 명종때 덕풍(德豊; 지금의 덕산) 호장(戶長)을 지 
내면서 별아산(別鵝山) 아래에 터를 잡고 세거하기 시작했다. 이 
재술의 아들 이언후(李彦厚)는 야인 정벌에 공을 세워 검교장군 
(檢校將軍)에 올랐고, 손자 이극보(李克甫)도 고려 원종때 대장 
군(大將軍)으로 몽고침입을 방어하며 무공을 세웠고, 증손자도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에 이르러 고려 중기에 3대에 걸쳐 장수 
를 배출한 가문이었다. 
덕산 이씨 가문의 융성은 조선 초기에서 돋보였다. 시조의 8세손 
인 판도판서(版圖判書) 이영(李英)의 아들인 이유(李愉) 이조(李 
造)는 조선개국 후 낙향하여 은둔하고 있다가 하륜 등의 천거로 
중앙정계에 진출하였다. 이유는 태종 5년(1405) 여진족을 정벌하 
여 공을 세우고 형조참의, 상주목사를 지냈다. 그후 사은사로 명 
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에는 백관의 조복을 색깔로 구분하여 
직위를 표시하자고 제안하기도했다. 이조는 태종 7년(1407) 조정 
에서 유례상정소(儒禮詳定所)를 설치하면서 참지의정부사(參知議 
政府事)로 발탁되었다. 이조는 태조 10년(1410)에 집현전 제학 
(集賢殿 提學)을 거쳐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덕산 이씨의 주요 세거지는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봉암동이 
다. 이 마을에는 154가구 중 121가구가 덕산 이씨로, 단종 1년 
(1453)에 만경현령으로 있던 이운현(李云顯)이 외가인 순흥에서 
지내던 중 세조 3년(1457) 순흥부에서 변란이 일어나자 이곳으 
로 난을 피해서 입향한 것이다. 덕산 이씨 가문의 후손은 영남지 
방이 1,300여호, 호남지방이 300여호, 서울·충청지방이 200여호 
였다. 따라서 충청지역 특히 본관 지역인 덕산지방에서의 가문발 
달은 약한 편이다. 이런 현상은 덕산 이씨가 토성으로서의 지위 
를 다른 성씨에게 내어준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덕산 황씨는 고려조에서 덕풍군(德豊君)에 봉해진 황언필(黃彦 
弼)을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조선시대에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성종 23년(1492)에 별시 문과에 을과로 장원을 하고 부윤이 된 
황린(黃璘)이 있고, 연산군 8년에 별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 
고 승지에 오른 황위(黃瑋)가 있으며, 중종 4년 별시 문과에 병 
과로 급제한 황여헌(黃汝獻)이 있다. 또 승지에 올랐으며, 효행 
으로 귀감이 되는 황필이 있다. 

3) 대흥현 

대흥지역의 토착 성씨에 관한 기록으로 처음 보이는 것은 『세종 
실록지리지』이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대흥지역의 토 
성(土姓)이 3이니, 이(李)·한(韓)·백(白)이요, 망성(亡姓)이 2 
이니, 장(張)·오(吳)요, 거변(居邊)의 속성(續姓)이 2이니, 홍 
(洪)·이(李)이다. 자손이 있는데, 향역(鄕役)에 종사한다. 
이들 중 성씨의 명맥이 파악되는 성씨는 대흥 이씨이다. 대흥 이 
씨 가문의 현조로는 이 태조가 함흥으로 가려하자 이를 만류하다 
가 예천으로 유배된 후 태종 3년(1403)에 풀려나와 대흥군(大興 
君)에 봉해진 이연주(李連柱)가 있다. 이연주는 고려 말에 관직 
에 올라 예문제학(禮文提學)에 이르렀고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했다. 이색·정몽주와 함께 충절을 지키다 경상북도 예천으 
로 유배되었다. 태종이 즉위한 뒤 그의 충절을 기려서 대흥군(大 
興君)에 봉해졌다. 그는 세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은 예 
천에서 머물러 살았고 두 아들은 본관지인 대흥으로 돌아왔다. 
대흥 이씨의 주된 세거지로 1930년에는 평안북도 박천군 청룡면 
일화동과 의주군 고부면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었고 그밖에 충북 

괴산군 연풍면 행촌리 등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