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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향교와 예산지방의 사림-1 게시판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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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선전기 향교와 예산지방의 사림-1
작성자 예산문화원 등록일 2004-07-07 조회 540
첨부  
 

1. 예산지방의 향교와 서원 


향교(鄕校)는 고려와 조선왕조의 집권적 정치구조 위에서 전개 
된 것으로 군현제와 함께 왕경이 아닌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 
기 위하여 설립된 관학교육기관이다. 향·교가 설치된 것은 고 
려 때 부터였다. 고려는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서 3경 12 
목을 비롯한 군·현에 박사와 교수를 파견하여 향촌교화에 노력 
하였다. 이것이 향학(鄕學)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이런 
노력은 고려시대의 군·현제 운영의 부진으로 향촌통제의 약화 
와 함께 그 운영의 헛점이 많았다. 따라서 향교교육도 제대로 정 
착되지를 못했다. 
지방에서의 유학교육의 보급과 이를 수행하는 향교의 건립과 보 
급은 조선왕조에 들어서서야 본격화 되었다. 태조는 즉위하여 향 
교를 통한 학교진흥에 힘써 수령에 명하여 향교의 흥폐를 수령 
의 치적 평가의 기준으로 삼기도 했다. 이런 국가적 관심으로 대 
부분의 군·현에는 향교가 건립되었다. 
향교 내에는 선성(先聖)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이 있고, 그 아래 
좌우에는 문묘가, 문묘의 앞에는 강학을 위한 명륜당이 있으며 
문묘의 좌우에는 유생이 거주하는 동서재가 있었다. 이런 향교 
의 외형은 서울의 성균관을 축소한 것이었다. 주(州)·부(府)에 
는 교수(敎授:종6품) 1명, 군·현에는 훈도(訓導:종9품) 1명을 
두어 교육을 담당하게 했다. 향교의 학생인 교생(校生)은 부·목 
이 각 90명, 군은 50명, 현은 30명이 기준 정원이었다. 국가에서 
는 향교에서의 흥학을 유지하기 위해서 학전 7~5결(結)을 지급 
하고, 노비와 책을 하사하기도 했다. 
양난 전·후에 향교에서의 교육 기능이 쇠퇴하긴 했지만, 지방 
의 세력자들이 관여하여 향교의 유지에 노력하여 향교는 지속되 
었다. 그런데 이런 이면에 향교는 지방사족이 향촌활동을 전개하 
는 필요한 구심점으로 신분적 지위확보와 기득권 세력으로의 위 
상확보가 이뤄지는 곳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예산지방에는 군·현마다 하나씩 건립되어 대흥향교(大興鄕校)· 
덕산향교(德山鄕校)·예산향교(禮山鄕校)가 있었다. 향교의 건립 
내력과 현존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흥향교는 태조 7년(1398) 창건했다고 전해오는데 교사 건립 
및 중수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는 없다. 추측컨대 창건 후 문묘의 기능과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해 오다가 임진왜란의 병란 속에서 소실되어 버려 전 
쟁이 끝난 후 몇 차례 중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덕산향교는 태조 7년(1398) 건립되어 인재양성(人才養成) 및 모 
성지소(慕聖之所)로서 운영되어 오다가 임진왜란의 병란으로 소 
실되었다. 숙종 8년(1682) 대성전 중수를 시작하여 숙종 9년 
(1683)에 명륜당·동재·서재를 건립하였다. 그 뒤 고종 7년 
(1870) 기타 건물을 건립하고 수시로 중수와 보수를 하여 현재 
에 이르렀다. 
예산향교는 태종 13년(1413) 대성전과 명륜당을 창건하여 성현 
을 추모하고 아울러 관내의 인재들을 교육하는 기관으로 중추적 
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다 임진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이후 다 
시 복원하였다. 
서원(書院)은 조선 중기 이후 학문연구와 선현제향을 위해서 사 
림(士林)에 의해서 설립된 사설교육기관이었다. 아울러 동시에 
향촌자치 기구의 하나였다. 서원은 중국 송나라 때 주희가 백록 
동 서원을 열고 도학연마의 도량으로 이를 보급하면서 성행하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중종 38년(1543) 경상도 풍기군수 주 
세붕(周世鵬)이 고려말의 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경상도 순흥지방에 백운동 서원을 창건한 것이 
시초였다. 
조선왕조의 서원은 중국의 영향을 받기는 했으나 기능과 성격 등 
에서 중국과 차이가 있었다. 중국의 서원이 관인양성을 위한 준 
비기관으로서 학교의 성격을 강하게 지녔던 데 비해서 조선시대 
의 서원은 사림의 장수처(藏修處)이면서 동시에 향촌사림의 취회 
소(聚會所)로서 정치적·사회적 기구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 
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서원은 흔히 서재(書齋)나 사우(祠宇)등 
과 혼칭되고 있었다. 
서원이 건립된 배경은 조선초 이래로 계속돼 온 사림의 향촌활동 
에 있었다. 사림은 향촌사회에 자신들의 기반을 구축하는 방법으 
로 일찍부터 사창제나 향음주례 등의 시행을 이뤄오고 있었다. 
특히 중앙정계 진출이 가능해진 성종 이후는 이를 공식화하고 국 
가정책으로까지 뒷받침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 구심체로서 
유향소(留鄕所)의 복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자 사림파의 향권 
(鄕權) 독점을 걱정한 훈척세력의 반대와 경재소(京在所)의 반대 
로 좌절되자 다시 사마소(司馬所)를 세워서 본래의 의도를 관철 
하고자 하였다. 사림파의 이런 노력은 연산군 때에 있어서 거듭 
된 사화(士禍)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 
서 교육과 교화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들의 향촌활동은 합리 
화 할 수 있게 되어 서원의 건립도 자연스럽게 전개 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조선시대에 건립된 서원은 그 숫자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것 
은 후일에 이를수록 서원의 건립이 인물 중심으로 남설(濫設)되 
어 사우와 구별이 모호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서원의 첩 
설을 금하는 조치로 인하여 처음에는 사우로 건립하였다가 다시 
정치적 변화나 서원 건립의 금령(禁令)이 느슨해지면 이를 서원 
으로 승격하곤 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의 숙종때 서원이 남설되면서 사우까지도 서원과 
비슷한 성격이 되어서 모호해졌다. 그리하여 이때 909개소에 이 
르게 되었다. 이 같은 숫자는 영조 17년(1741) 서원 철폐 논의 
당시 서원·사우 등 여러 명칭을 모두 헤아린 숫자가 1,000여 개 
소에 가깝다고 말한 것이 통계로서 뒷받침되고 있다. 
서원의 운영은 국가의 일정한 영향하에 있었으나 그 세부운영과 
교육에 관한 예조의 직접적인 지휘·감독은 없었다. 서원의 교육 
은 자체적으로 제정한 원규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원규에는 서원 
의 입학자격과 원임의 선출절차, 교육목표 및 벌칙조항이 수록되 
어 있다. 서원교육은 원장·강장촵훈장 등의 원임에 의해 
서 수행 
되었다. 
서원의 입학자격은 시대별·지역별 혹은 서원별로 천차만별이었 
다. 그러나 대체로 입학의 자격을 보면 까다롭지 않았고 생원· 
진사를 대상으로 한 것이 일반적이었다. 서원의 교육내용은 성리 
학적이고 도학적인 것이 중심을 이루었다. 관학에서의 교육이 과 
거와 법령의 규제에 얽매인 것과 비교할 때 서원교육은 사학 특 
유의 자율성과 특수성이 존중되었다. 원생에 대한 교육은 원규 
에 의한 규제와 원생 자신의 자율적인 실천과 학습의 조화 속에 
이루어졌다. 원규에서는 수학규책, 거재규책, 교수실천요강·독 
서법 등 유생으로서 지켜야 할 준칙이 실려 있었다. 
이런 강학 활동 이외에 서원의 제향 기능으로 그 교육적 의미가 
높아졌다. 서원에서 행하는 춘추사는 엄격한 의례절차를 수반하 
는 것으로서 원생들에게 바람직한 인간상인 선현을 제시하고 춘 

추향사에 참석할 사람을 선정하여 청금록에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