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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향교와 예산지방의 사림-2 게시판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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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선 전기 향교와 예산지방의 사림-2
작성자 예산문화원 등록일 2004-07-07 조회 570
첨부  
 

2. 예산지방의 사림(士林) 


예산지방 출신의 인물로 중종 14년(1519) 11월의에 일어난 기묘 
사화와 명종조에 일어난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고난을 겪은 인물 
들은 아래와 같다. 
김구(金絿 : 1488-1534)는 자가 대유, 호는 자암, 본관은 광산으 
로 현감 계문의 아들로 김굉필의 문인이었다. 그는 예산 신암면 
출신으로 중종 2년(1507) 생원시와 진사시에 장원하고 중종 6년 
(1511)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중종 10년(1515)에 부수 
찬이 되었고 중종 14년(1519) 부제학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해 
에 일어난 기묘사화에 몰려 조광조·김정과 함께 투옥되어 개령 
(開寧)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남해(南海)로 송치되었다. 중종 
26년(1531) 전라도 임피로 옮겨졌고 중종 28년(1533) 풀려나 예 
산으로 돌아왔다. 유배생활 10여년 만에 고향인 예산으로 돌아왔 
으나 부모는 타계한 상태였다. 그는 부모의 산소에서 통곡하며 
효도하지 못한 한탄 속에서 병을 얻어 이듬해 죽으니 47세였다. 
그는 우리나라 8대 서예가 중의 한명이었다. 서울 인수방(仁壽 
坊)에 살았던 관계로 그의 서체를 인수체(仁壽體)라 한다. 예산 
군 신암면 용궁리 종가에는 공이 사용하던 벼루가 보관되어 전한 
다. 선조때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의공(文懿公)이다. 
예산의 덕잠서원과 임피의 봉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이담(李湛)은 호가 정존재(靜存齋)로 중종조에 대사간 부제학을 
지냈다. 고덕면 사람으로 본관은 용인 이씨이다. 김굉필의 문인 
으로 중종 33년(1538)에 문과에 급제하고 정언 공조정랑·응요· 
사간·승지·공조참의를 역임했다. 성리학자로 의약·천문·산수 
·궁술·서화에 뛰어났다. 명종조의 을사사화에 양산으로 귀양갔 
다. 회암서원에 배향되었다. 
민회현(閔懷賢)은 중종조 조광조의 현량과 출신으로 정언으로 등 
용되었다. 기묘사화에 파직되어 향리인 예산 신암으로 낙향하여 
일생을 마쳤다. 
이약수(李若水:?~1521)는 자가 지원(止源)으로 호는 우천(牛泉) 
이다. 본관은 광주(廣州)로 현감 자(滋)의 아들이다. 생원시에 
합격하고, 중종 14년(1519)에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유배되자 동 
료 유생 150여명을 이끌고 궐내에 들어가 조광조의 신원을 호소 
하다가 의금부에 갇혔다. 중종 16년(1521)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창성(昌城)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기묘명현으로 칭해지 
고, 대흥 우천사(牛泉祠)에 배향되었다. 
성수종(成守琮:1495―1533)은 창녕 성씨로 대사헌 세순(世純)의 
아들이다. 성수침(成守琛)의 아우로 조광조의 문인이었다. 중종 
14년(1519)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이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스승인 조광조 등이 화를 입을 때 조광조의 문인이라 대 
간이 지목하여 탄핵을 받고 과거급제 명단에서 삭적되었다. 이 
에 조광조가 처형되자 벼슬을 단념하고 초야로 낙향하였다. 예산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문장이 뛰어나 독특한 경지 
를 이루었고 시도 잘 썼으며, 학문이 깊어 장래 영달할 사람으 
로 인정받았으나 정계에 나가지 않고 청빈하게 살다가 죽었다. 
창녕의 물계서원과 파주의 파산서원에 제향되었고 예산에는 그 

의 후손이 많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