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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산의 실학자
작성자 예산문화원 등록일 2004-07-07 조회 733
첨부  
 

 

예산지방의 실학자 

예산의 대표적인 실학자(實學者)로는 여주(驪州) 이씨 가문을 중 
심으로 배출된 이용휴, 이가환, 이병휴, 이삼환, 이재위 등과 신 
암면 용궁리 출생의 추사 김정희가 있다. 이들 여주 이씨는 모 
두 이익의 자손들로서 그의 학문과 실학정신을 이어 받아 이 고 
장에서 실학을 빛낸 인물들이고, 김정희는 실사구시학파를 이루 
어 조선 후기 실학의 대가로 꼽힌다. 
예산지방 실학자들의 큰 특징은 위의 언급과 같이 여주 이씨 가 
문에서 상당수 배출되어, 부자관계 혹은 삼촌관계로 구성된 친족 
집단이 가학(家學)을 중심으로 실학을 계승·발전시켰다는 점이 
다. 이는 덕산현감 이명진(李明鎭)이 처가의 고향인 예산으로 입 
향한 이래 이병휴, 이용휴, 이가환, 이재위 등이 이 고장에 뿌리 
를 내린 것에서 비롯된다. 또 이익의 영향으로 실학이 이 가문 
의 가학으로서 계승되었던 점도 큰 영향 중의 하나이다. 
이용휴(李用休:惠?:1708~1782)는 이익의 조카이자 이가환(李 
家煥)의 아버지이다. 문학과 음운학 및 천문학·병학·농학에 이 
병휴는 경학에 기초하여 서양의 과학을 높이 평가하고 특히 수학 
교육을 중시하였다. 이익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진사시에 합격하 
였으나 과거를 보지 않고, 시속의 풍속을 짓거나 경전에 모법을 
두고 고인지법(古人之法)에 맞는 문장을 이룩하는데 노력을 쏟았 
다. 그는 천문·지리·병농 등 실학의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또 『해서개자(海西짵者)』라는 한문소설에서 거지가 순진하고 
거짓 없는 마음씨를 가졌다고 하였으며, 거친 들판·산협에 숨 
은 선비 또는 농촌에서 일하는 이들 가운데 참된 사람이 있을 것 
이다 라고 하여 하민층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그의 문학관은 문 
학의 영달을 위한 수단이 아닌 문학 그 자체의 진실을 추구하였 
고, 주자학적 권위와 구속을 부정하였다. 저서로 『탄만집』, 
『혜환시초(惠?詩?)』, 『혜환잡저(惠?雜著)』가 있다. 
이가환(李家煥:錦帶·貞軒, 1742~1801)은 이용휴의 아들이자 
이익의 손이며, 천주교인 이승훈(李承薰)의 외숙이다. 학문적으 
로 정약용, 이벽(李蘗), 권철신(權哲身) 등과 교류하였다. 그는 
정조 8년(1784) 이후 천주교에 대한 흥미를 갖고 『성년광익(聖 
年廣益)』등을 탐독하고, 교리를 번역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으 
나, 정조 15년(1791) 신해박해 때 광주부윤으로서 천주교를 탄압 
하였다. 또 정조 19년(1795) 충주목사로서 천주교인을 탄압하다 
가 파직되었다. 그러나 그후 다시 천주교를 연구하여 순조 1년 
(1801) 이승훈·권철신 등과 함께 옥사로 순교하였다. 그는 정조 
로부터 정학사(貞學士)라 불리울 만큼 대학자였다. 새로운 입장 
에서 학문을 연구하였으며 비판의식과 과학정신에 기초하였다. 
특히 천문학과 수학에 정통하여 내가 죽으면 이 나라에 수학의 
맥이 끊어지겠다.라고 할 만큼 수학의 대가였다. 저서로는 정조 
와의 문답으로 엮어진 『금대전책(錦帶殿策)』과 『금대유고(錦 
帶遺稿)』가 있다. 
이병휴(李秉休:貞山, 1711~1767)는 숙부인 이익의 경학을 이어 
받아, 이 일문에서 이가환·이구환·이희환·이삼환·이재학 및 
그의 제자로 이기양(李基讓), 권철신 등의 재학을 겸비한 실학자 
가 배출되었다. 그는 정통파적 보수성을 보이면서도 서양과학을 
높이 평가하고 수학교육에 힘쓰는 등 진보적 사고를 나타냈다. 
이러한 그의 개명적 견해는 실학파의 경학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 
였다. 
이삼환(李森煥:木齋, 1729~1814)은 아버지 이병휴로부터 경학 
을 이어받아, 12세때 이익의 학문에 입문하여 선생의 각별한 지 
도를 받았다. 이익이 별세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벼슬에 뜻을 두 
지 않고 후배를 양성하면서 오직 경학연구에만 전념하였다. 그 
는 도덕군자로서의 위치를 지키면서 실사구시의 학문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저서로는 『소미산방(小眉山房)』, 『목제1호장(木 
齋一號藏)』 등이 있다. 
이가환(李嘉煥,:蕓圃, 1722~1779)과 이재위(李載威:柿軒, 
1745~1826)는 부자지간인데, 만물의 품성은 인류의 과학적 분석 
에 의해 일상생활에 이용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실학 
의 성격상 모든 사물을 실질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요구되고 벌레 
나 물고기, 초목이라 하여 범연히 보아 넘길 수 없는 것이라 하 
였다. 이러한 그들의 실학사상은 『물보(物譜)』를 저술하여 더 
욱 체계화되었다. 
김정희(金正喜:秋史·禮堂 등, 1786~1856)는 박제가로부터 사 
사받고, 순조 9년(1809) 70여 일 동안 연경(燕京)을 다녀오는 
등 선진문물을 접하면서 그의 학문을 넓혔다. 그는 정부서경(政 
府署經)을 시작으로 규장각 대제(奎章閣 待制)·충청좌도 암행어 
사·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등을 거쳐 병조참판(兵曹參判) 
·형조참판(刑曹參判)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선행 실학자들 
의 실증적 연구방법을 계승하는 동시에 청의 고증학을 받아들여 
실사구시적인 새로운 경학(經學)을 수립하였다. 또 우리 민족문 
화의 주체적 의식을 명백히 하여, 북한산(北漢山) 신라 진흥왕 
순수비(眞興王 巡狩碑)를 발견하는 등 금석·전고 등에 대한 격 
조높은 학문성을 보여주었다. 한편 그는 서예(書藝)에 있어서도 
추사체(秋史體)라는 서체(書體)를 남길만큼 조예가 깊었다. 그 
의 학문은 자기의 정치적·사회적 이념을 앞세워 고전을 주관적 
으로 인용·해석하던 기존의 실학자들과는 달리 학문 그 자체에 
목적을 두고 엄격한 객관적 태도로 사실을 밝혀내고자 하였다. 
그는 이렇게 다양한 학문과 고증의 실천적인 학문을 통해 실사구 
시의 학맥을 구축, 정립하여 조선 후기 실사구시학파를 이루어냈 
다. 그의 고택(故宅)과 유택(幽宅)이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현 
존하며, 저서로는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실사구시설(實 
事求是說)」·「완당집(玩堂集)」 등이 있고, 작품으로 묵죽도 
(墨竹圖)·묵란도(墨蘭圖)·세한도(歲寒圖) 등이 있다. 
이상과 같이 예산지방에는 이익의 후손 여주 이씨를 중심으로 그 
들의 사우·문인들이 배출되고, 또 김정희라는 실사구시학파의 
대가가 배출되어 조선 후기 실학이 크게 융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