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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의 전래와 예산 게시판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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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천주교의 전래와 예산
작성자 예산문화원 등록일 2004-07-07 조회 712
첨부  
 

1. 천주교의 전래 


조선말기 정치적 혼란으로 인한 신분제의 동요와 경제적 변동 등 
으로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자 기존의 유교질서(儒敎秩序)는 더 
이상 사회 지배이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이에 따 
라 새로운 사상의 보급이 일어나 천주교(天主敎)나 동학사상(東 
學思想)이 만연하였다. 
특히 천주교는 17세기 이래 우리나라에 소개되면서 신앙운동이 
크게 일어나 교세가 확장되었고, 가혹한 박해와 탄압을 받으면서 
도 그 교세가 점차 확장되었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소개된 것 
은 17세기인데, 이는 16세기 말엽 중국에 전래된 것을 중국을 왕 
래하는 사신들이 우리나라에 전래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초기에 
는 서학(西學)의 일부로서 받아들였을 뿐 종교(宗敎)로서 기능하 
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영조(英祖) 말엽에 정권에서 소외된 남인 
계 실학자들에 의해 각종 천주교 서적이 연구되고 차츰 종교적 
색채를 띠어 신앙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천주교가 광범하게 유포된 것은 정조 7년(1783) 이승훈(李承薰) 
이 북경(北京)에서 서양신부로부터 세례(洗禮)를 받아 천주교 신 
자가 되어 돌아온 후 부터이다. 그를 따라 이벽(李蘗)·이가환 
(李家煥)·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권철신(權哲身)·권 
일신(權日身) 등 남인(南人) 시파(時派)계의 학자와 신분적으로 
불만을 가졌던 중인, 상민·부녀자들이 신자가 되어 천주교가 널 
리 유포되었다. 
천주교의 유포가 확대되자 정부에서는 이를 군신·부자간의 의 
를 경시하고 현실세계를 부정한다 하여 사교(邪敎)로 규정하여 
정조 9년(1785) 금령(禁令)을 내렸다. 정조 15년(1719) 전라도 
진산(珍山)에서는 윤지충(尹持忠)이 모상(母喪)을 당하여 신주 
(神主)를 불사르고 천주교 의식을 행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에 정부에서는 윤지충을 처형하고, 홍문관(弘文館)에 소장되었 
던 서양서적을 소각하는 등 천주교의 전파를 더욱 통제하였다. 
그러나 당시 천주교의 전파는 크게 사회문제화 되지 않고, 더욱 
이 정조는 남인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천주교에 대해 가혹한 탄 
압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천주교의 교세는 더욱 확장되 
어 정조 18년(1794)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국내에 들어 
와 활동할 당시 4,000여명 이었던 신자가 19세기 초반에 10,000 
여명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2. 천주교의 확대와 탄압(彈壓)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가 즉위하자 천주교에 대한 일대 박해가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노론벽파(老論僻派)가 득세하여 그들과 정 
치적으로 대립관계에 있던 남인시파(南人時派)를 제거하는 과정 
에서 천주교도들에 대한 탄압이 가해졌던 것이다. 
순조 1년(1801)의 박해를 신유박해(辛酉迫害)라 하는데, 이승훈 
·이가환·권철신·정약종·주문모 등 300여 명이 처형되었고 정 
약전·정약용 등이 유배당하였다. 이때 황사영(黃嗣永)이 북경 
에 있는 프랑스 주교에게 군대를 동원하여 조선에서 신앙과 포교 
의 자유를 보장받게 해달라는 서신을 보내려다 발각된 사건이 일 
어났다. 이는 황사영 백서사건(帛書事件)이라 하는데, 이러한 천 
주교의 외세의존적 행위 때문에 정부에는 더욱 가혹한 박해를 가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는 앞서의 언급과 같이 정치적 문제 
와 연관되었고, 이외에 전국적으로 발발하였던 농민항쟁에 대처 
하기 위한 공포정치 시행이라는 측면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순조 31년(1831)에 조선교구가 독립되 
었다. 또 헌종 2년(1836)에는 파리외방전도협회 소속의 3명의 신 
부(모오방·샤스탕·앙베르)가 입국하여 포교활동을 벌였고, 이 
에 헌종 5년(1839)에 이들 프랑스 신부 3명과 신도 수십명이 처 
형된 기해박해(己亥迫害)가 발생하였다. 
그 뒤 헌종 2년(1836) 프랑스 신부 모오방에게 세례를 받고, 헌 
종 9년(1843)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를 졸업한 김대건 
(金大建)이 헌종 11년(1845) 귀국하여 충청남도 당진지역(솔뫼) 
을 근거로 활발한 포교활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처형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극심한 세도정치와 정치기강의 문란으로 생활이 극도로 
피폐해진 중인과 평민들의 입교가 급증하면서, 19세기 중엽 
10,000여명 이었던 신도수가 19세기말에는 30,000여 명에 달하 
여 천주교의 교세는 크게 확장되었다. 

3. 예산지방의 천주교 

예산지방은 이익의 후손인 여주 이씨 일가의 실학자들 중에서 천 
주교를 수용한 이들이 많이 나타나고, 그들의 사우(師友) 및 문 
인들을 중심으로 확대되었다. 대표적으로 이가환은 서양신부로부 
터 세례를 받은 이승훈의 외숙이 되고, 이벽과도 친분이 있었으 
며, 부친 이용휴(李用休)의 제자 권철신과 함께 천주교를 신봉하 
다가 순교(殉敎)하였다. 이밖에 이승훈이 정조 15년(1795) 예산 
에 유배되었던 연고와,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충청남도 일대에 
서 포교활동을 벌여 예산지방에서는 다수의 천주교 신자가 나타 
났다. 
순조 1년(1801) 신유사옥(辛酉邪獄) 당시에는 덕산 출생의 황필 
(黃泌)이 희생되었고, 예산군민 광옥이 체포되었다. 황필은 덕 
산 출신으로 서학에 심취하여 서양인에게 세례를 받고, 중국인 
신부 주문모를 위하여 활동하였고, 광옥은 제사라는 것은 일체 
무익하다고 하고 천주교를 전도하였던 인물이었다. 또 이전 정 
조 22·23년(1798·1799) 호서일대(湖西一帶)의 박해 당시에 이 
지현(李止玄)이 순교하기도 하였다. 이외에 신유사옥과 관련하 
여 처단된 일반 신자들이 상당수 많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수천여명의 신자들이 각지에 
흩어져 교회재건운동(敎會再建運動)을 도모하였다. 이에 순조 11 
년(1811) 또다시 전국의 천주교 신자가 잡혔는데, 이때 덕산·해 
미·홍주 등지에서 14명의 교인이 잡히는 등 우리고장에서도 끊 
임없이 천주교인이 나타나고 이에 따라 순교자가 발생하였다. 한 
편, 내포지역에 정조 8년(1784) 천주교회가 창설되고, 이 속에 
서 수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하고 각처에 교우촌(敎友村)이 생겨나 
면서 충남지역에 활발히 전파되어 많은 천주교 신자가 나타났 
다. 이에 따라 예산지방에는 고종 14년(1877) 9월 입국한 두세 
(Doucet, 정가이 丁加彌)신부가 고종 20년~21년(1883~1884), 천 
안·아산·당진·서산·공주·부여·논산·서천 등지를 방문할 
때 예산읍 간양골(현재의 예산읍 간량리)과 양촌(현재의 고덕면 
상궁리)을 방문하여 이곳을 공소(公所)로 설정하였다. 따라서 우 
리 고장에서는 혹독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다 

시 많은 천주교 신자가 배출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