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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사회경제의 발전과 예산 게시판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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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선 후기 사회경제의 발전과 예산
작성자 예산문화원 등록일 2004-07-07 조회 728
첨부  
 

1. 조선 후기 사회경제의 발전 


17세기 이후 농지개간과 개량농법의 보급으로 농업생산력이 증가 
하여 조선 후기의 경제는 성장·발전하게 되었다. 농지의 개간 
은 주로 왕실이나 양반지주층에 의해 주도되어 묵은 땅의 개간, 
늪지의 간척, 황무지의 개간 등으로 농지경작면적이 임진왜란 이 
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여기에 밭을 논으로 만드는 반답(反畓) 
이 성행하고, 밭농사에 윤작체계가 정립되었다. 또 이앙법(移秧 
法)이 보급되면서 노동력이 절감되는 동시에 논에서의 이모작이 
가능해져 농업생산량이 급증하였다. 
농업생산력의 발달과 농업노동력의 절감으로 일부 농민들은 경영 
규모를 확대하여 부를 축적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광작(廣作) 
을 행하여 수확을 증가시키고, 채소·유채류·약재·인삼·연초 
등 상업적(商業的) 농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여 경영형부농(經營 
形富農)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생산력의 증대는 기존의 지주 
(地主)와 전호(佃戶)와의 관계에 변동을 초래하였다. 기존에 지 
주와 전호와의 관계가 주로 신분적 예속 성격이 강하였던 반면 
에, 생산력의 증대에 따라 이들은 주로 경제적인 관계로 제편되 
었던 것이다. 
한편 농업생산력이 증가되자 상업적 농업이 등장하여 잉여농작물 
이 발생하고, 이 잉여농작물이 상품(商品)의 의미를 띠게 되었 
다. 이에 따라 상품·화폐경제가 촉진되어 상업이 발전하여, 전 
국에 걸쳐 장시가 개설되어 이미 18세기 중엽에는 1,000여 개소 
가 넘었다. 조선후기 경제발전에서 주목되는 것은 공인자본(貢人 
資本)의 발생이다. 공인은 대동법의 실시로 나타난 어용상인(御 
用商人)으로서 정부 조달물품 구입을 위해 서울의 시전(市廛) 
및 지방의 장시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또 이들은 특정 물품을 
대량으로 취급하여 독점적 도매상인 도고(都賈)로도 성장하였 
다. 또한 서울 및 지방각지에서는 사상(私商)들이 활동하였는 
데, 이들은 자유롭고 폭넓은 상업 활동을 통하여 영세한 난전(亂 
廛)의 형태를 극복하고 도고상인으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이들 
은 서울의 경강상인(京江商人), 개성의 송상(松商), 중강(中江) 
·책문(柵門)후시(後市)에서 사무역(私貿易)을 통해 이익을 얻 
은 의주의 만상(灣商), 왜관(倭館)에서 대일무역으로 자본을 축 
적한 동래의 래상(萊商) 등이 있다. 
상업의 발달은 수공업(手工業)과 광업(鑛業) 분야의 발달에 영향 
을 미쳤다. 당시 수공업은 관영(官營)수공업이 쇠퇴하고 사영(私 
營)수공업이 성장하는 추세였고, 18세기 말에는 공장안(工匠案: 
공장의 명부)이 폐기되어 공장(工匠)들은 자유로운 독립 수공업 
자가 되었다. 수공업자들은 공인이나 상인들에게 원료와 자금을 
지원받아 제품을 생산하였고, 이 제품은 다시 이들 공인·상인들 
에 의해 판매되었다. 따라서 수공업자들은 공인·상인들의 자본 
에 종속되어, 독자적으로 제품을 생산할 만큼 성장하지 못하여 
상업자본(商業資本)에 의한 수공업지배가 이루어졌다. 

2. 예산의 예덕상무사 

예산지방에서는 조선 후기 사회경제의 발전과 궤를 같이하여 상 
공업이 발달하였다. 특히 보부상(褓負商) 단체인 예덕상무사(禮 
德商務社)가 결성되어 당시의 유통경제 발달상을 잘 보여주고 있 
다. 
보부상은 보상(褓商)과 부상(負商)을 총칭하는 말로, 둘다 행상 
조합으로서 주로 시장을 무대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물건 
을 전달·교환하는 전문적인 시장상인이다. 보상은 주로 포백(布 
帛)·지물(紙物)·금(金)·은(銀)·동(銅)·삼(蔘)·면화(棉花) 
·피혁(皮革) 등 값비싼 세공품이나 잡화를 취급하였고, 보자기 
에 싸서 들거나 질방에 질머지고 다니며 판매하여 봇짐장수라고 
도 하였다. 부상은 어염(魚鹽)·토기(土器)·죽물(竹物)·곽(藿) 
·청마(靑麻)·면자(麵子)·남초(南草) 등 일용품(日用品)이나 
가내수공업품(家內手工業品)을 위주로 취급하였고, 지게에 얹어 
지고 다니며 판매하여 등짐장수라고도 하였다. 이들은 하루에 왕 
복할 수 있는 곳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장시를 순회하면서 
각지의 물품을 유통시켰고, 규모가 큰 보부상들은 수운(水運)과 
우마차를 이용해 다량의 상품을 운반, 판매하기도 하였다. 
보상과 부상의 행상조합은 별개로 존재하였는데, 고종 20년 
(1883) 혜상공국(惠商公局)이 설치되어 양조직을 통합하였다. 이 
는 고종 22년(1885)에 상리국(商理局)으로 개칭되어 부상을 좌단 
(左團)으로, 보상을 우단(右團)으로 구분하였다. 고종 36년 
(1899) 상리국과 육의전(六矣廛)을 합하여 상무사(商務社)가 만 
들어지고 좌단을 좌사(左社)로 우단을 우사(右社)로 개칭하였 
다. 그후 상무사는 진흥공사(進興公社)로, 고종 40년(1903)에는 
공제소(共濟所)·상민회(商民會)로, 고종 41년(1904)에는 진명회 
(進明會)·공진회(共進會)로 개칭되었다. 예산지방에 남아 있는 
예덕상무사는 당시 조직이 그대로 명맥을 유지한 것이다. 
이들은 경제활동 이외에 국가의 유사시 동원되어 정치적 활동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시 행주산성 전투에 수천명의 부상 
들이 식량과 무기를 운반·보급하기도 하였으며, 병자호란 때 부 
상들이 식량을 운반하고 성을 방어하기도 하였다. 또 고종 3년 
(1866) 병인양요(丙寅洋擾), 고종 31년(1894) 동학농민혁명 등 
각종 사건에 보부상들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예산지방에는 예산과 덕산지방을 중심으로 당진·면천지역까지 
활동하였던 예덕상무사가 있었고, 현재에도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또 보부상유품전시관에 충남 예당상무지사인(忠南禮唐商務 
支社印) 1과, 상무사 충청남도 예산군지부인(商務社忠淸南道禮山 
郡支部印) 대·소 각 1과, 영위직인(領位職印) 1과, 반수직인(班 
首職印) 1과, 접장직인(接長職印) 1과, 인통(印筒) 1개 등의 각 
종 인장류를 비롯하여 예산임방절목(禮山任房節目, 철종 2년 
(1851)) 1책, 임소좌목(任所座目, 고종 18년(1881)) 1책, 의정부 
완문(議政府完文, 고종 18년(1881)) 1책, 보상선생안(褓商先生 
案, 고종 18년(1881)) 1책, 예산임소좌목(禮山任所座目, 고종 22 
년 (1885)) 1책, 선생안(先生案, 고종 22년(1885)) 1책, 예·덕 
·면·당 4읍 임소소임안(禮德沔唐四邑任所任案, 고종 29년 
(1892)) 1책, 예산임소좌목(禮山任所座目, 고종 42년·1905) 1 
책, 예산보상임소좌목(禮山褓商任所座目) 순조 1년(1907)) 2책, 
순종 2년(1908) 1책, 덕산본소임방장내좌목(德山本所任房帳內座 
目, 미상), 예산본방장내좌목(禮山本房帳內座目, 미상), 덕산본 
소장내좌목(德山本所帳內座目, 미상), 절목(節目, 미상) 등 각 
종 전적(典籍)과 공문(公文) 등이 남아 있어 당시 예산지방 보부 
상들의 조직과 활동상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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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충청남도지』上, 1979. 
邊太燮, 『韓國史通論』, 삼영사, 1986. 
예산군, 『예산군지』, 1987. 
정덕기, 『韓國社會經濟史硏究』, 형설출판사, 1987. 
한국사연구회편, 『한국사연구입문』, 지식산업사, 1987. 
중앙일보사, 『성씨의 고향』, 1990. 
충청북도, 『충청북도도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 12, 한국정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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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희·최근묵·조원래·김상기, 『임진왜란과 이치대첩』, 충 

남대학교백제연구소·금산군,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