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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회와 예산-1 게시판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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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근대사회와 예산-1
작성자 예산문화원 등록일 2004-07-07 조회 826
첨부  
 

가. 대원군의 개혁정치 


현종이 후사(後嗣)없이 돌아가자 고종이 즉위하였으나 왕의 아버 
지인 대원군이 왕을 대신하여 실권을 잡게 되었다. 따라서 대원 
군은 집권과 동시에 왕권의 재확립을 도모하는 것이 당면한 목표 
였기 때문에 대내적으로는 전제정치를, 대외적으로는 쇄국정치 
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내적 개혁정치로는 서원(書院)의 철폐와 인재의 등용, 관제의 
개혁, 법전의 편찬, 호포법과 사창제도의 부활과 경복궁(景福宮) 
의 중수를 들 수 있다. 대원군은 유림의 소굴이며 당쟁의 본거지 
인 서원에 대한 폐지령을 내렸다. 즉 고종 5년(1868)에 전국의 
47개 서원만 남기고 화양동(華陽洞)서원 이하 전국의 서원을 철 
폐시키고 그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유생들의 활동을 제지하였다. 
동시에 외척인 김씨의 세력을 눌러 당쟁의 고질을 뽑으려고 파벌 
과 지연을 막론하고 사색(四色)을 고르게 등용하여 유신정치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비변사를 폐지시키고 의정부와 삼군부(三軍 
部)를 부활시켜 행정권과 군사권을 담당케 하였다. 이것은 왕권 
강화를 위한 조치였으며 관료제의 강화를 위한 개혁정책이었다.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수한 후 그 재정적 보완책으로 군포를 호포 
(戶布)라 하여 양반들에게까지 부과시켰다. 
뿐만 아니라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임진왜 
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을 재건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공사로 인 
한 재정적 적자를 보전하기 위하여 결두전을 비롯하여 원납전과 
당백전 등을 징수하여 경제적 파탄을 가져오게 하였다. 

나. 대원군의 쇄국정책 

대외관계로서는 19세기 이래 이양선(異樣船)의 통상요구를 거부 
하였던 대원군은 철종 이후 천주교의 교세확장을 주시하고 있었 
으며 프랑스 신부를 통하여 러시아의 남진책을 저지하려던 계획 
이 실패되자 그는 천주교의 탄압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종 3년(1866)에 조두순(趙斗淳)의 배외정책(排外政策) 건의에 
따라 프랑스 신부와 많은 교인들을 학살하였으니 이것이 병인사 
옥(丙寅邪獄)이다. 이 사건의 내용을 알고 있었던 리델(Ridel)신 
부의 탈출사건은 결국 병인양요(丙寅洋擾)라는 프랑스 함대의 침 
략을 맞게 되었다. 
이 때 탈출하였던 리델(Ridel)신부는 프랑스 극동함대의 로즈 
(Roge)제독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이에 프랑스 북경주재 대리 
대사인 벨로네(Bellonet)는 신부학살의 보복으로 조선을 침공하 
였다. 그들은 무력정벌에 의한 개국과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양화 
진, 문수산성, 정족산성 등지에서 이용희(李容熙)·한성근(韓聖 
根)·양헌수(梁憲洙) 등의 힘으로 격퇴 당하였다. 
또한 고종 3년에 미국상선 셔먼호(General Sherman)가 평양에서 
조선관헌과 충돌하여 소각된 일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된 북 
경주재 미국공사 로우(F.Low)는 로제(Rodgers)아세아함대 사령관
에게 조선정벌을 명하여 고종 8년(1871)에 인천 앞바다에 들어 
와 광성진(廣城津)을 공격하니 이것이 신미양요(辛未洋擾)이다. 
이 전투에서 어재연(魚在淵)은 전사하였으나 조선군대는 끝까지 
미국함대를 격파시켰다. 
이와 같이 두차례에 걸쳐 양요를 물리친 대원군은 의기양양하여 
쇄국정치를 강화시켰고 이른바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쇄국정치 
의 표본으로 삼게 하였다. 이 비문은 서양오랑캐가 침범하는데 
도 싸우지 않고 화합한다면 나라를 파는 것과 같으니 자손만대까 
지 후회하게 될 것이다.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에 세우다(洋夷 
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吾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이라 적혀 
있다. 
고사에 이르기를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하여 화려한 꽃은 
열흘 가기가 어렵고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하여 세도권력이 10 
년 가기가 힘들다는 말이 있다. 대원군의 개혁정치와 쇄국양이정 
책 등 독재정치도 10년만에 몰락당하고 며느리 명성황후에게 실 
권이 넘겨졌다. 명성황후가 집권하게 되자 안으로는 척족 세도정 
치의 재현으로 내정이 부패되고 밖으로는 자주성을 상실한 문호 
개방 정책으로 말미암아 일본제국주의 세력을 받아 들여 한반도 
를 비롯한 대륙침략의 터전을 마련해 주게 되었다. 특기할 사실 
은 민씨일파에 이용당하였던 대원군의 형 흥인군 이최응(李最應) 
의 묘소가 예산군 대흥면에 있다. 이최응의 신도비(神道碑)는 고 
종 19년(1882) 임오군란 당시 영의정 이최응이 구식군대에 의해 
피살되자 고종황제가 그를 기리기 위하여 세웠다.(『예산의 
脈』, 275쪽) 

다. 대원군의 정치와 예산 

대원군이 시행한 개혁정치의 하나로 서원철폐령이 내리면서 예산 
지방에 있었던 덕잠서원(德岑書院)과 회암서원이 철폐당하고 말 
았다. 덕잠서원은 조선왕조 숙종(肅宗)때 예산지방의 유생들이 
자암 김구(金絿)선생의 높은 덕과 학문, 굳은 충정과 백성을 위 
하여 선정을 펴보려던 뜻을 존중하여 금오산 동쪽 덕잠골에 세웠 
다. 이 서원은 숙종 40년에 왕이 특사를 보내어 덕잠서원이라는 
친필액자를 하사하였다. 이렇듯 격이 높은 서원이었으나 고종때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서원철폐정책에 의하여 없어지고 말았 
다. 현재는 초석과 김구 선생의 후손이 소장하고 있는 현판만이 
남아 있다.(『예산의 脈』, 36쪽) 
참고로 서원철폐령에도 불구하고 충청남도 내에 남겨진 서원은 
세군데가 있다. 첫째는 사계 김장생과 그 아들 신독재 김집, 동 
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을 제사지내는 돈암서원과 둘째로 윤 
황, 윤문거, 윤극을 제향하는 노강서원과 세 번째로 윤집, 오달 
제, 홍익한 등 3학사를 제향하는 창열서원이 있다. 
또 하나 특기할 사실은 대원군의 하야원인이 화서 이항로와 면 
암 최익현 등 유학자의 상소문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대원군의 하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면암 
최익현이다. 최익현은 화서 이항로의 문인이다. 화서는 기호학파 
의 정통이며 당대 유생의 대표로 당시 유생을 싫어하는 대원군 
도 유생의 세력을 무마하기 위하여 승정원(承政院) 부승지를 제 
수하였다. 그러나 화서는 취임 4일만에 장문의 소장으로 대원군 
의 실정(失政)을 비판하였다. 이에 대하여 대원군도 어찌할 수 
가 없어 이항로를 공조참판에 승진시켰다가 그것을 사퇴하자 도 
총부 부도총에 올렸으나 역시 사퇴하였다. 그리고도 화서의 논조 
는 강경하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고종 5년에 화서가 죽고 그의 
문인인 최익현을 사헌부 장령으로 등용하여 유생들을 회유하였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