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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회와 예산-2 게시판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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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근대사회와 예산-2
작성자 예산문화원 등록일 2004-07-07 조회 672
첨부  
 

 

라. 면암 (勉菴) 최익현 (崔益鉉)과 예산 

최익현은 대원군이 특별히 백성들에게 원성을 사고 있는 정책 중 
에서 재정을 낭비하는 토목공사를 중지하고 수렴정책을 중단할 
것이며 당백전의 폐지와 경성문세의 폐지 등을 강력하게 주장하 
였다. 대원군은 이에 대하여 최익현에게 책임을 추궁하였으나 뒤 
이어 국왕은 특명을 내려 최익현을 돈녕부 도정에 승진시켜 대원 
군과 정면 대립케 하였다. 고종 즉위 이후 조대비 청정을 대리하 
여 국정을 한손에 장악한 대원군은 고종 3년 조대비에게 청정을 
반환한 뒤에도 계속하여 대권을 행사하였으나 고종 10년 가을에 
최익현의 소장으로 할 수 없이 하야하게 되었다. 이 때 고종은 
군부(君父)를 논박했다하여 최익현을 제주도로 귀양보냈으나 고 
종 10년 11월 13일 이 소장을 계기로 국왕은 대원군으로부터 정 
권을 접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듬해인 고종 11년 2월에 만동 
묘 복설령이 내리고 12년에는 최익현이 석방되었다. 드디어 대원 
군은 54세로 정권에서 물러났으며 대원군이 시행한 정책은 단계 
적으로 폐지되고 쇄국정책은 개국정책으로 변하여 문호개방을 하 
게 되었다. 최익현은 1876년 일본과의 통상조약체결시에도 격렬 
한 척사소(斥邪疏)를 올려서 조약체결을 반대하였고 단발령에 반 
대하여 일본과 외세의 불법무도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림으로서 
의암 유인석을 중심으로 한 제1차 전국 유림의병(儒林義兵)의 불 
꽃을 붙이었다. 그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70세의 고령임에 
도 불구하고 팔도 선비들에게 포고문을 내어 항일투쟁에 나아갈 
것을 호소했다. 전라도 태인에서의 의병모집을 시발로 순창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인 일본군에 대항해 싸웠으나 일 
본군대에게 패전하고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그는 조국이 아닌 왜 
적의 땅인 대마도에서 일본의 음식은 먹을 수 없다하고 굶어서 
순국했다. 면암집(勉菴集)에 수록된 글을 보면 임금으로 하여금 
오직 영구히 의뢰심을 버리고 자립정신을 굳힐 것을 간청했고 일 
제는 머지 않아 패망할 것을 예언하였다. 그리고 나이 74세이니 
죽는 것이 조금도 애석하다고는 생각지 않으나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죽게 되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 
다. 그의 묘소는 1907년 논산군 노성면의 국도변에 만들어졌다 
가 1910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로 이장하였다. 그 뒤 예산출신 
명사들로 구성된 모현사업회에서 면암최익현선생춘추대의비(勉菴 
崔益鉉先生春秋大義碑)를 건립하였다.(『예산의 脈』, 218쪽) 

2. 남연군묘 도굴사건과 예산 

가. 남연군묘와 보덕사 

남연군(南延君)은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아버지로서 자 
는 구(球), 인조(仁祖)의 왕자 인평대군(麟平大君)의 6세손으로 
은신군(恩信君)에게 양자로 가서 남연군이 되었다. 남연군묘는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上伽里)에 위치해 있다. 이 남연군묘가 위 
치한 자리는 본래 가야산 일대에서 제일 큰 절인 가야사가 있던 
곳이다. 이곳은 풍수지리설의 좌청룡 우백호가 웅장하게 뻗어 내 
려진 명당이어서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라 하여 2대에 걸 
쳐 왕위에 오를수 있다는 곳이라고 알려졌다. 그래서 흥선대원군 
은 부친의 묘를 경기도 연천땅 남송정(南松町)에서 이곳으로 면 
례를 하여 이장을 한 것이다. 이 때 대원군은 왕권에 야심을 품 
고 안동 김씨들로부터 갖은 수모를 다 겪으면서 살아왔기 때문 
에 기필코 왕통을 이어 가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철 
종이 아들이 없는데다가 병약함으로 왕통을 자기 아들로 이어가 
자는 계획이었다. 그는 안동 김씨를 싫어하던 조대비(趙大妃)와 
연결하여 이 계획을 면밀히 추진하였다. 대원군은 풍수지리의 신 
봉자로 99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있는 가야사를 불태우고 금탑을 
허물면서 이 묘자리를 차지하였다. 그후 7년만에 고종이 탄생하 
였고 고종이 왕으로 등극함에 따라 흥선군(興宣君)은 대원군(大 
院君)이 되어 왕권을 한손에 쥐고 흔들게 되었다.(『예산의 
脈』, 396쪽) 
가야사를 불태워 버린 죄책감에 사로 잡혔던 대원군은 그의 아들 
인 고종이 왕위에 즉위하자 불살라 버린 가야사의 동쪽 산중턱 
에 새절을 창건했다. 이 절의 이름을 부처님께 속죄한다는 뜻으 
로 보덕사(報德寺)라 명하였다. 보덕사는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남연군묘를 가기전 약 2Km지점의 오른편 산에 위치해 있다.(『예 
산의 脈』, 3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