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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회와 예산-3 게시판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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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근대사회와 예산-3
작성자 예산문화원 등록일 2004-07-07 조회 682
첨부  
 

나. 독일상인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과 예산 


고종 5년(1868) 독일의 상인 오페르트(Ernest Oppert)가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남연군묘를 도굴하려다가 실패한 굴총사건이 바 
로 국제적으로 알려진 남연군묘 도굴사건이다. 고종 3년(1866) 
에 2차에 걸쳐 우리나라와 통상을 요구하다가 실패하고 돌아간 
오페르트는 고종 5년 4월 제3차 한반도 답사를 계획하고 한 때 
미국 영사관에 근무한 적이 있는 미국인 모험가 젠킨스(Jenkins) 
를 자본주로 하여 프랑스인 선교사 페롱(Feron)을 통역관 겸 보 
좌관으로 대동하여 680톤의 기선 차이나호(The China)에 60톤의 
소증기선 그레타호(The Greta)를 붙여 백인 8명, 말라야인 20 
명, 한인 천주교도 약간명을 비롯하여 약 100명의 청국인을 승무 
원으로 하여 상해를 출항하였다. 
이들의 항해 목적이 무엇인지는 그들의 최고간부 이외는 아무도 
알 수 없었으나 젠킨스가 후일 재판소에서 진술한 바에 의하면 
첫째, 조선왕국과 통상조약 체결을 교섭하자는 것이고 둘째, 조 
선왕국의 사신 1명을 배에 태워 지구일주여행을 시키자는 것이 
며, 셋째 이와 같이 함으로써 은둔국인 조선을 세계에 소개하자 
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진의와 실제 행동은 전연 다 
른 방향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북독일연방의 국기를 계양 
하고 일본 나가사끼를 거쳐 동년 4월 18일에 충남 홍주군 행담도 
에 와서 정박하였다. 
이로부터 그들은 소증기선 크레타호에 옮겨타고 구만포에 이르 
러 상륙하고는 스스로 아라사 군병이라고 사칭하며서 함부로 발 
포하고 횡포를 부렸기 때문에 지방관헌도 접근할 수 없었다. 그 
리고는 야음을 타서 예산군 덕산면 가동의 남연군의 묘소에 이르 
자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하였다. 이때 덕산군수 이종신(李鍾信) 
과 묘지기 등 몇 사람의 동민이 그들을 제지코자 하였으나 무장 
한 양인들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이러는 동안에 날이 밝아오고 
동민들이 운집하고 또한 바다물의 썰물시간도 임박하여 그들은 
도굴작업을 중단하고 황급히 구만포로 퇴각하였다. 그리하여 하 
리후포(下里後浦)에 도착한 후 민가에 대하여 갖은 횡포와 약탈 
을 감행하고 20일에야 차이나호에 옮겨타고 바다로 자취를 감추 
었다. 
2일간에 발생한 이 해괴하고도 엽기적인 도굴사건이 관찰사 민치 
상(閔致庠)에게 보고되자 그는 군관 100여 명을 출동시켜서 추격 
케 하였으나 헛수고로 그치고 말았다. 이 소식이 중앙에 전해지 
자 조정에서는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낀 대원군이 극도로 분 
노하여 양이(洋夷)의 추적을 엄명하는 동시에 이들과 내통한 천 
주교도들에 대한 엄중한 단속령을 내렸다. 
한편, 바다로 퇴거했던 차이나호는 서해안을 북상하여 21일 영종 
진(永宗鎭) 앞바다에 나타나서 말하기를 남연군묘를 발굴한 것 
은 앞서 셔어맨호 사건 등 서양인 살해에 대한 보복작전이었으 
니, 속히 사신을 데려오라고 강요하는 한편 성문을 공격하였다. 
이에 신효철(申孝哲)이 지휘하는 100여명의 아군 수비병과 충돌 
하여 2명의 사망자와 많은 부상자를 내고 퇴각하였다. 오페르트 
일행의 이러한 만행은 국내에서는 물론 상해주재(上海駐在) 외국 
인들 사이에도 적지않은 물의를 야기시켰던 바, 마침내 젠킨스 
는 불법파렴치한 행동의 피고인으로 체포 기소되었고 배석판사 
인 헤이스(Hayes)는 이 사건이 해적행위와 같다고 논박하였다. 
불행중 다행이도 이 사건이 미수에 끝나고 말았으나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이땅에서 천주교는 더욱 더 박해를 당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