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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서천 게시판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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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임진왜란과 서천
작성자 서천문화원 등록일 2002-05-08 조회 1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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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선조25년(1392)4월15일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하여
왜국의 풍신수길이 제1진으로 소서행장, 종의지, 송포진신등을
대장으로 하고 병력18,000명을 350여척의 병선에 분승시켜 부산
에 상륙하여서는 그날로 부산첨사 정발을 동래에서는 부사 송상
현을 전사시키고 짓밟은 다음 북진하였고 그 다음 4월 19일에는
제2진22,000여명이 가등청정 및 대장의 인솔 아래 상륙하여 북진
하였고 제3진은 대장 흑전장정 및 대장의 인솔로 10,000여명이
상륙 제4진으로는 14,000명, 제5진으로 25,000여명, 제6진으로
15,000여명, 제7진으로 30,000병력, 제8진으로 10,000명, 제9진
으로 11,000명, 그밖에 수군 9,000명이 참가하여 도합 164,000명
의 육상병력과 9,000명의 병력으로 우리나라를 침공한 전쟁이었
다.
충청도 지방에서도 공주 청련사에서 기병한 영규대사가 옥천에
서 기병한 조헌과 함께 1,700여명의 의병으로 청주를 공격 점령
하였다. 여기 의병에는 홍주- 홍성의 신간수, 장덕개가 의병
1,600여명을 이끌로 호응할 때 서천 한산 비인지역에서 많은 유
인들이 합세하였으며 청양 정산의 임정식도 60여명의 의병을 이
끌고 싸웠으며 공주 우성의 노씨형제도 이에 가담하여 싸웠다.
그들은 조헌을 의병장으로 하고 다음에는 금산 와룡평에서 700여
명의 잔존세력으로 왜군과 싸웠으나 끝내 싸워 모두 전사하는 구
국에의 산화가 되어갔던 것이다. 이와같이 의병은 전국에서 봉기
하고 명나라에서 원군이 도래하여 싸우고 하여 전투는 전국적으
로 번져서 산발적인 전투와 대전투는 끊일 날이 없었다. 육지에
서 이와 같은 전투가 벌어질 때 우리수군은 적에게 조금도 양보
없이 수역을 지켰다. 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수군을 이끌고 전전
전승하여 적의 침공을 막았으나 한때 모함으로 옥고를 치르고 백
의종군을 하는 등 구국의 일념에서 싸워 그가 전사할 때까지 한
국수군의 기백은 대단하였다. 국토는 초토화되고 왜군의 약탈과
살인방화는 끊일 날이 없었으나 백성들은 잘 견디어 냈다. 백성
들의 끈기와 군사들의 사기와 의병들의 구국신념에서 차츰 전세
는 호전되어 갔으며 왜군은 8월18일에 풍신수길이 병사함으로 더
욱 약세에 놓이게 되고 그 해11월19일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이
끄는 우리수군에게 적선 200여척이 격파되는 해전이 있은 후에
는 더욱 패세가 감돌아 그후부터는 저항할 힘을 잃어갔었다.
7년간의 임진왜란중 서천군은 그 전쟁터의 피해는 입지 않았으
나 농민들이 군문 또는 의병으로 싸워 피를 흘렸다. 그리고 그
후에 큰 가뭄이 계속 되었으나 끝내 이겨냈으며 초근목피(草根木
皮)라는 말도 이때에 생긴 말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