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메뉴 닫기
서브페이지 배경
3.1운동과 우리고장 게시판 상세보기

[서천문화원] - 역사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3.1운동과 우리고장
작성자 서천문화원 등록일 2002-05-08 조회 1336
첨부  
 
일제의 무단정치는 경제적인 착취에 따른 계략과 한국민을 탄압
함으로써 일제의 식민지화 하는데 목적을 두었으므로 그들의 행
동은 잔인하였다. 일제는 조선시대 500년간의 사직을 뒤업고 극
히 소수의 친일세력의 도움으로 한일합방의 성사는 이루었으나
애국지사들의 저항에 불안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우리의 애국지
사들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에 열을 올렸다. 애국지사들은 고국
을 떠나 중국 만주의 벌판에서 전력을 비축하여 직접 싸웠으며
국내에서는 여러곳에서 독립투사들이 저항했었다. 서천군 일원에
서는 민종식, 안병찬, 김복한이 이끄는 의병활동에 적극가담하
여 많은 희생도 각오하였으며 이상재가 이끄는 기독교계통에도
교인들이 주동이 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서천을 비롯
한 한산 비인 판교에는 독립운동을 자처하는 결사의 모임도 등장
하였다. 그래서 한일합방 후 더욱 고조된 반일의식은 더욱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드디어는 1919년 3.1운동때에는 온국민이 참
여하는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와같이 항일사상은 고조되고 있었던 시대에 그 시대적 흐름
을 타고 거사는 동경에 유학중인 동경유학생들에 의해서 도화선
이 되었다. 동경유학생 최팔용등 유학생들은 조선청년독립회를
조직하여 1919년2월8일에 동경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독립을 요
구하는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대표가 본국에 파견
되어 독립운동의 계획을 전달하게 되고 이와같은 사실에 국내에
있던 독립운동자들에게는 큰 자극을 불러 일으키게 된 것이다.
동경유학생들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받은 국내에서는 고종의 장례
일인 3월3일에 기하여 거족적인 항일운동을 일으키려고 천도교
의 손병희, 기독교의 이승훈, 불교의 한용운등 민족대표33인은
이를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1919년 3월1일에 태화관에서
민족대표33인으로 최남선이 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을 선
언하였으며 같은 시간에 학생 시민들도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운동에 들어갔다. 시민들은 비밀리에 만든 태극기를 들고 거
리에 나와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고종의 인산을 앞두고 모여 들었
던 군중들이 합세함으로써 서울은 독립만세로 들끊게 되었다. 이
와같이 서울에서 그 절정을 이룬 독립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파
급되어 전국에서 200여만명이 참가했으며 국외에서는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만주 간도지방을 비롯하여 미국 및 외국에서도 확
대되어 갔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독립을 절규하는 극히 평화적이
고 무저항적인 3.1운동이었으나 일제는 무자비하게 총검으로 살
상을 일삼은 진압으로 많은 희생속에 3.1운동은 진압되었다. 전
국218개군 가운데 211개군이 참가하여 200만명이상이 3.1운동에
참가하고 주권을 달라는 진정한 절규도 일본경찰이 7,500여명의
한국인을 살해하였으며 부상자는 16,000여명에 달하고 그들이 체
포한 사람은 47,000여명에 달하는 독립운동도 총검에 그만 진압
되고 독립은 묘연하게 흘러갔다.
서천군에서는 3월7일에 독립선언서가 나돌았다. 서울에서 33인
이 연서된 독립선언서가 독립투사들에 의해서 발표되고 파고다공
원에서 많은 군중이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시위가
따랐으며 독립선언서에 연서한 33인이 모두 체포되었다는 소문
이 나돌아 서천에서도 만세운동에 따러야 한다고 나선 인물은 화
양면에 사는 조남명이었다. 그는 서천 장날에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서 거사를 치르기로 하고 화양면과 기산면을 돌면서 거사
를 계획하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어 잡혀가는 도중 삼산리 시장 군
중앞에서 만세를 부르짖었다. 그리고 서천에서 대대적인 만세운
동은 3월 29일 마산 신장리 장터에서였다. 장날을 이용하여 3.1
운동의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한 기독교인 송기면은 교인인 유
성열, 이근호등과 논의하고 29일 낮 1시경 장터에 모여드는 군중
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송기면은 단위로 올라가 독립선언
서를 낭독한 다음 독립만세를 부르자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부르
며 호응하여 시위로 들어갔었다. 시위가 계속될 때 왜경은 송기
면등 6명을 체포함으로 이에 격분한 군중2,000명은 경찰 출장소
를 습격하고 6명을 구출한 다음 경찰 출장소를 부수기 시작하였
다. 이때 경찰이 총을 쏘아 2명이 부상하였다. 군중들은 격분하
여 한산쪽으로 시위를 계속하다가 왜경의 총포로 해산되었다. 신
장리 독립만세사건에 이어 4월 30일에는 종천면 화산리에서
2,000여명이 독립만세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