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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의 우리고장 게시판 상세보기

[서천문화원] - 역사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일제시대의 우리고장
작성자 서천문화원 등록일 2002-05-08 조회 1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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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주의하의 36년간은 숨통이 막히고 신체의 자유조차 잃
은 암흑기였다. 일제의 침략은 착취적인 방법을 택하여 농민의
농토를 빼앗고 무지한 농민들로 하여금 땅을 잃게 하였으며 그들
은 그들대로 한국에 침투하여 상권 농업권마저 쥐게 되었다. 서
천군의 각면에도 일인들이 정착하연서 많은 토지를 획득하고 지
주적인 입장에서 우리 농민들로 하여금 혹사한 땀의 대가로 영화
를 누렸으며 거리에는 일본인의 상점이 등장하여서는 단시일내
에 기업화하여 그들이 상권마저 쥐게 되었다.
1910년이후 1920년대에 걸쳐서는 농토를 잃고 만주 간도로 농
토를 찾아가는 농민이 부지기수였으며 또는 농토를 버리고 노동
으로 생계를 의지하기 위하여 일본등지로 떠나는 동민들도 많았
다. 일제는 그들 나름대로 그들의 신을 받들기 위하여 서천군에
도 각 면마다 신사를 설립하는 과정에 있었으며 혹은 신사를 만
들어 놓고 우리국민에게 참배를 강요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절대
적인 성리학의 고장인 우리고장에서는 향교를 비롯한 각 사우에
서 우리의 조상을 모시는 제향이 베풀어졌고 단군을 모시는 제향
도 있었으나 일제들은 이와 같은 고유한 신앙도 말살시키려 하였
었다. 일제는 그들의 명절인 날에는 동쪽을 향해서 예를 올리도
록 강요하였으며 그들의 궁전인 동쪽방향을 신성시하게 하였다.
그러나 서천군의 유림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은 끝까지 이를 반대
하였으며 우리의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희생을 하였다. 한
국을 식민지하고 다시 중국을 침략하기 시작하여 만주국을 세운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고는 그 후 국민총동원이란 명
목으로 더욱 농민들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그들의 본국으
로 수송해가는 미곡의 산미증산사업을 더욱 장려하기 위하여 각
농가마다 공출미의 증수가 늘어났으며 전쟁에 필요한 광공업분야
에도 긴급령을 내려 총동원계획에 따른 증산운동에 들어갔다.
일제는 금강하구에 장항제련소를 시설하고 이곳에서 생산되는 금
괴를 그들의 본국으로 수송하여 전쟁준비에 따른 자본으로 활용
하였으며 나무가 우거진 산에서는 벌채를 하여 그들의 전쟁비용
에 충당했다. 이에 다시 인적 물적동원의 불가피해짐에 따라 서
천군의 농촌에도 근로보국대 학병징용등 명목으로 청년 장년들
이 그들에게 끌려가서 전선에 투입되었으며 장년들은 공장이나
광산으로 끌려갔다. 징용에 끌려간 장정들은 멀리 사할린의 탄
광을 비롯하여 구주의 탄광과 만주 안산제강소에 끌려가서 모진
육체노동을 하였다. 현재까지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는 사할린
을 비롯한 만주에 징용됐던 한국인도 수만명이 넘는다. 일제는
이와 같은 잔인한 식민정책에도 아랑곳없이 더욱 인적 물적자원
이 궁핍해지므로 1942년에는 징병제를 실시하여 한국청년들에게
수많은 희생을 강요하였다. 서천군에서 내고장의 문화발전과 사
회복지 나아가서는 독립을 쟁취하여 우리의 손으로 독립국가를
건설해야겠다는 큰 뜻아래 서울을 비롯하여 일본등지에서 고등교
육을 받던 전문학교 대학생들을 필두로 젊은 청년들이 모두 징집
되는 악순환 속에서 그들은 징집되어 이번에는 세계2차대전 폭발
과 함께 멀리 북쪽으로는 아류산열도를 남쪽으로는 남쪽의 열대
지방에 투입되어 전쟁의 희생물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중에서 일본군영을 탈출하여 연합군인 미.영 중국진영으로 귀
순한 학병청년들도 많았으나 대부분의 징병에 따른 군문입대자
는 희생자로 다시는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는 그 수효가 많았다.
세계2차대전 폭발후 전세는 연합군의 유리한 전선으로 돌아가
면서 일제는 서천군 일원에서도 식량을 공출케 하는 동시에 비행
기 헌납금으로 돈을 강제로 징수하는가 하면 심지어 식기까지 포
함한 금속기의 공출등으로 가재용품인 식기까지 강탈당했으며 그
외에도 군사시설에 강제로 동원되어 전적으로 국내에서도 한국민
을 모두 희생양으로 삼으려 하였다. 이에 병행해서 일제가 우리
민족을 말살하려는 시책으로 내선일체와 일선동조론의 어처구니
없는 강제시책이었다. 일제는 역사를 조작하여 그들이 이르기를
일본의 고대사에 나오는 아스카 문화의 원류가 백제문화이고 일
본의 시조인 아마데라스 오오까미를 한국인의 시조라고 우기면
서 참배시키려는 음모끝에 부여에 부여신궁을 건립하여 역사를
오도시키려 하였다. 당시 조선총독 미나미지로는 대동아공영권
을 건설하는데에는 무엇보다도 조선인을 완전히 일본화하는 정신
훈련이 필요하다고 따라서 일본인과 조선인은 이라는 인식을 똑
바로 심어주기 위해서 내선일체 사상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이와같은 사실을 그는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한국인의 성씨개명
을 하게 하여 한국인도 일본인처럼 성씨와 이름을 고치게 하였
다. 성과 이름을 고쳐부르게 한다는 일제의 만행은 성씨와 이름
을 그들처럼 개명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학교에서 수학할 것을 거
부당했고 기성층은 일제로부터 불순한 인물로 지목되어 신변에
위협을 주었으므로 성씨와 이름을 개명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은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더욱 가혹해 갔
다. 대동아공영권의 리더임을 스스로 자부하며 2차대전까지 몰고
간 일제는 1944년 후반기부터 패색이 짙었으며 그들의 군벌주의
적 형태는 차츰 무너져가지 시작했다. 한국의 하늘에 연합군의
항공기가 비래하기 시작하였다. 해상수송을 하는 일제의 수송선
이 자주 폭격을 당하여 서천에도 폭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서천군 서면 마량진앞에서는 주유선인 수송선의 폭격으로 바다
에 기름이 떳으며 장항제련소 앞바다에 드나드는 수송선은 항시
연합군 항공기의 폭격을 면할 수가 없었다. 군산에서 미곡을 수
송하는 수송선은 밤에 미곡을 적재하고 밤에 군산항을 촐발하여
일본으로 향했으나 목포를 지나지 못하고 모두 폭파되었다. 연합
군의 폭격이 심해지면서 일제는 한국에서 최후의 일선으로 승리
로 이끌어간다는 망상끝에 한국에서 초토작전에 들어갔다. 즉 연
합군이 상륙하면 해안선에서 저지하여야 한다 해서 해안선에 구
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해안선을 따라 선을 긋듯 파는 구덩이에
는 그 지역의 부역이 따랐다. 식량이 공출당하고 먹을것도 없이
허덕이는 농민들에 구덩이를 파게하여 육체적 노동까지 강요당햇
던 것이다.
서천군출신으로 독립의 쟁취하기 위해서 만주 중국으로 떠났던
독립투사들은 총검을 들고 피를 흘리며 싸웠다. 더구나 징병에
끌려갔다가 일본의 군영에서 탈출해 오는 한국 청년 학생들과 연
합전선으로 대륙에서는 여러곳에서 독립군과 일군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그리고 1945년 7월에는 연합군이 장암포 상륙하여 일
제가 패전직전에 파괴할 것이라는 장할제련소부근에는 소개령이
내려졌으며 일군은 더욱 전력을 집중시키는 듯했다. 연합군의 항
공작전에 꼼짝 못하는 수송선이 군산항 장항항에 묶였으며 한낮
에는 공습경보에 대피가 연속되는 가운데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에 따른 선언과 함께 한반도에서는 36년간 통치하며
착취와 만행과 살상을 일삼던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는 끝나고 해
방을 맞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