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메뉴 닫기
서브페이지 배경
8.15광복과 우리고장 게시판 상세보기

[서천문화원] - 역사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8.15광복과 우리고장
작성자 서천문화원 등록일 2002-05-08 조회 1215
첨부  
 
일제의 군국주의와 한국의 친일세력에 의해서 한일합방이 이루워
진지 36년만에 자주독립을 얻을수 있는 기회가 이루어지고 온갖
고통에 시달리던 국민의 환호속에 1945년 8월15일을 맞이하였으
므로 그와같은 환희와는 달리 시간이 흐르고 시일이 흐를수록 석
연치않은 일만 되풀이 되어갔다.
카이로선언이후 일본의 패색이 짙어진 1945년 2월 미국의 루스
벨트대통령과 영국의 처칠수상 소련의 스탈린수상등 미.영.소 3
국 대표자들이 얄타비밀협정에서 소련의 대일전쟁의 요구와 함
께 일본이 항복을 하면 한국의 38도선에서 분할하여 연합군이 점
령한다는 묵계가 있었다. 이렇게해서 연합군은 사실상 한국문제
를 그들의 이익을 위한 방편으로 협약이 이루어졌던것이다 그 협
약대로 소련은 1945년 종전무렵 8월9일에야 일본에 참전하여 북
쪽으로부터 밀려왔으며 소련의 참전은 극동에서의 일본의 지위
를 더욱 곤경에 빠지게 하고는 8월 15일에 일본이 항복을 하기
에 이르르자 그 길로 남하하여 8월 22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
영.소의 외상회의에서는 한국의 신탁통치를 결의하였다.해방과
더불어 독립을 기대하였고 한국민은 또 다시 신탁통치가 실시된
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되자 전국민은 반탁운동을 일으키게 되었
다. 그러나 소련의 사주를 받은 좌익 공산계열은 그 태도를 변경
하여 신탁통치 지지를 즉 찬탁으로 나오게 됨에 따라 이에 찬탁
반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공산측의 찬탁운동에 격분한 국민은
더욱 반탁운동을 확대시켰고 남한의 미군정에서는 민주의원이란
고문기관을 둠으로써 민주 자유진영이 걸속되어갔다. 전국민의
반탁운동의 물결속에서 1946년 3월 서울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소련은 반탁운동을 전개한 정당과 사회단체
를 한국의 임시정부를 위한 협의대상에서 제외하고자 주장함으로
써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었다. 1947년5월에 다시 제2차 미.
소공동위원회를 열었으나 소련의 반대로 결렬되고 미.영.중.소
의 4개국 회의의 개최와 인구비례의 입법의원설치법도 역시 소련
의 거부로 실패하였다. 이것은 한국인의 의사표시와 자유를 허용
하여야 한다는 미국의 주장과 그것을 반대하는 소련의 주장이 대
립됨으로써 결실을 밎을 수가 없었다. 찬탁과 반탁의 물결
속에
서 좌익과 우익의 충돌은 여러곳에서 일어났다. 충청도의 경우대
전역전에 자리잡은 전국노동자평의회 및 남로당과 우익진영인 독
립촉성회와의 충돌과 학생운동의 핵을 이루는 전국학생연맹과 좌
익학생단체인 전국민주학생동맹 그리고 좌익청년단체와 우익청년
단체와의 충돌이었다. 좌익진영인 각 단체는 옥외투쟁의 일환으
로 여러곳에서 인민대회라는 옥회집회를 통해서 파괴행위로 일관
되었다. 우익진영의 반격으로 여러곳에서 피를 흘리는 사건도 발
생하였다. 좌익진영은 소련의 사주를 받은 38선 이북에서 대대적
인 숙청으로 민족주의자인 조만식선생을 비롯한 애국지사를 숙청
하고는 적화통일을 위해서 남한의 공산분자를 조종하여 파괴를
일삼았으나 이에 우익진영의 대치로 빈번히 그들은 악 인상과 함
께 차츰 그 세력이 쇠퇴하기에 이르렀다.
1946년 12월 미군정의 지원아래 입법의원이 설치되었다. 여기에
는 45명의 민선의원과 동수의 관선의원이 선출되어 김규식이 의
장이 된 이 입법의원에서 여러 법령이 개정되었다. 그후 민정장
관에 안재홍이 취임하여 과도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어 미국은
1947년에 한국독립문제를 국제연합에 제출하기에 이르렀으나 소
련의 반대를 하고 나섰다. 그러나 미국은 남한에서만이라도 그들
에게 주권을 부여하여야 한다는 원칙아래 총선거를 실시키로 가
결하였다. 해방이후 정치적 혼란은 정치지도자들의 입장이 각각
달랐다. 이승만의 독립속성회와 김성수의 한민당은 남한만의 총
선거를 주장항데 대하여 김구 중심의 한독당은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을 각각 주장하였다. 1948년 5월 19일 U N 감시하의 총선거
가 실시되었다. 이 자유선거로써 198명의 제헌의원이 선출되었으
며 5월 20일에 그 의회가 열렸다. 제헌의회 의장에 이승만 부의
장에는 신익회가 당선이 되어 7월 17일에 헌법이 공포되었으며 8
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하였다. 새로 출범하는 대한민국
은 미국을 비롯하여 세계 여러나라의 승인을 받았으며 그해 12ㄴ
월에 UN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를 인정을 받았다. 이
것은 일본에게 주권을 빼았기고 그 설움에 복받쳤던 국민이 4년
만에 우리 민족의 정부가 다시 성립되었음을 뜻하였으며 민족의
정통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8.15 해
방후 좌익과 우익의 충돌이 차츰 좌악세력의 쇄퇴로 안정을 찾아
갔다. 그보다 먼저 특기할 것은 8.15해방후 지방에서 유일하게
발간되는 중선일보가 한글로 일본의 모조건 항복을 일러부었다.
이는 오랫만에 우리의 글을 보는 듯한 인상이었다. 충청도의 행
정처인 충청남도청에는 일본관리들이 위축되어 뿔뿔히 흩어지는
그 가운데서 당시 충청남도청 광공부장이었던 현석호씨가 해방된
지 이틀만에 우리나라 직원들을 도로 철수하였으나 미군의 진주
가 늦어짐에 따라 모든 행정은 마비되어 있었다. 대전에 미국이
진한 날은 1945년 10월7일이었다. 미군정하의 초대도지사는 카프
대령이었으며 일본군에 대한 무장해제와 함께 박재홍지사로부터
업무인계도 받았다. 카프대령이 충남지사로 부임하면서 첫번째
부닥친 문제는 좌익의 난동과 국민들의 식량난이었다. 그러잖아
도 일제시대 일제의 착취와 공출등으로 심각했던 식량이 8.15해
방 후 갑자기 충당되기는 어려웠다. 거기다가 해방과 더불어 싹
튼 자유방조직인 풍조로 생산분야에서나 노력분야에 산세력의 파
괴행위에 모두가 공포속에 있었다. 이와 같은 어려운 상황에서
미군정은 첫째 식량란 극복에 힘쓰며 공산분자의 파괴행위에 완
강히 저항하여 질서를 잡으면서 차츰 민심을 수습하기에 이른 것
이다.